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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평점 :
3년 전, 부다페스트에 간 적이 있다. 첫 유럽 여행이었다. 산도르 마라이를 알았고 세체니 다리를 알았고, 영화 글루미 선데이에 나오는 군델 레스토랑을 알았다. <도어>를 쓴 서보 머그더는 그 때 몰랐다. 도어를 읽는 동안 몇 번은 부다페스트 거리와 산도르 마라이 소설 '열정'을 떠올렸다. 부다페스트에 다녀온 후, 나는 서재에서 '열정'을 다시 찾아 읽기도 했다.
그렇듯 <도어>의 마지막 장을 덮은 이 겨울의 새벽, 나는 다시 부다페스트로 갈 채비를 하고 싶다. 그래서 3년 전 여름에 가보았던 도심 한복판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지나 며칠 동안 그 거리를 또 걸어보고 싶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거리에서 눈을 쓸고 있을 에메렌츠를 만날 것만 같다.
비올라가 집 지키는 일을 기꺼이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노예로 태어난 것이 아닐뿐더러, 조만간 개가 혼자 남게 되기에 나이 든 사람은 개를 길러서는 안 되며, 그때가 되면 개는 쫓겨나고 주인없이 떠돌아다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 P77
나는 일을 할 수 없는 정도로까지 몰려 있었다. 나 스스로 여기서 떠날 것을, 그리고 떠난다면 살아온 삶을 포함하여 어떤 형태로 떠날 것인지 내가 결정하기를 그들은 의도했으나, 그 증오가 나를 곧추세웠다. - P153
모든 것에 반대하는 그녀의 경멸 속에는 기형적인 무언가가 있었으리라. - P154
그녀는 눈의 여왕이었으며, 그녀 자신이 확실함 그 자체였다. 여름에는 첫 번째 체리였고, 가을에는 영근 밤, 겨울에는 화톳불에 익힌 호박, 봄에는 관목의 첫 봉오리였다. 에메렌츠는 깨끗했고 논란의 여지없이 우리 누구나가 항상 되고자 했던, 가장 선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영원히 이마를 가리고 있던, 호수의 얼굴을 하고 있던 에메렌츠는 그 누구로부터 그 어떤 것도 청하지 않았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어떤 짐이 있는지 전 생애에 걸쳐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모두의 짐을 짊어졌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낼 법 했을 때, 그녀의 삶에서 유일한 불명예스러운, 병이 그녀를 더럽힌 순간, 나는 사람들이 그녀를 발가벗길 수 있게끔 방송출연을 위해 방송국으로 갔고, 그녀를 내팽개쳤다.
- P282
눈보라가 엄청 휘날릴 때는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게 위장을 하는 듯했다. 항상 단정하게 차려입던 그녀는 거대한 헝겊인형 같았고, 빛나게 광을 낸 신발 대신 고무장화를 신고 작업을 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한겨울에 그녀는 아마도 집에 있는 경우가 없으며, 마치 다른 운명을 지난 사람처럼 잠도 물리치고 오직 길에만 머무는 듯 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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