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게 다 늙기 때문이지, 라고 답했다. 꽤 자주. 왜 인간은 기껏 태어나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느냐는 물음이 떠오를 때마다 말이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썩 유쾌하지 않은 노동에 바치면서, 그렇게 해서 번 돈도 마음껏 쓰지 못하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던지기를 주저하다 결국 포기하고 남은 미련에 허우적거리면서, 달지만 해로운 것들을 참으면서, 꾸역꾸역. 그러니까 이게 다 늙기 때문이지.


늙어감 없이 젊게만 살다가 떠나는 삶을 상상해 본다. 나는 맨날 놀다가 돈이 떨어지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일도 좀 지겹네.’라고 스스로에게 한마디 던져 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하고, 다시 돌아와서 놀고, 그렇게 살 거다. 기실 사람이 젊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 괜찮고, 어떻게든 살 수 있는 법이다.


“몸을 등한시하면서도 몸과 더불어” 살던 젊은 시절과는 다르게, 인간은 나이가 들면 “몸을 통해 늙어가면서 몸을 적대시”한다.(79쪽) 젊어서는 관심을 주지 않아도 얌전히 제 기능을 다하여 나와 세상의 순조로운 접촉을 돕던 몸이, 늙어서는 더이상은 못 참겠다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쑤시고 아프게 하면서 자기주장을 해대는데, 그걸로도 분이 안 풀리는지 쪼그라들기까지 한다. 이 몸도 내 몸이라고 건사하기 위해 끌고 밖으로 나가서 돈을 벌어 보려 해도 써먹기 힘들고 누가 써주지도 않는 몸.


그러니 젊어서 고생해야 한다. 물론 젊어서 고생한들 늙어서 고생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젊어서 고생하지 않으면 늙어서 더 고생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만, 죽어가는 과정에서조차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177쪽) “열악한 환경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복도에서 불편한 몸을 질질 끌어야만 한다.”(178쪽)


『사는 게 뭐라고』의 저자 사노 요코는 암 선고를 받고 기뻐하며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외제차까지 뽑았더랬다. 앞으로 1년 정도면 죽으니 무섭지 않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기도 하면서. “안 무섭다니까. 오히려 기뻐. 생각해봐. 죽으면 더 이상 돈이 필요 없다고. 돈을 안 벌어도 되는 거야. 돈 걱정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행운인걸. (…) 게다가 암은 정말로 좋은 병이야. 때가 되면 죽으니까. (…) 류머티즘 같은 건 점점 나빠지기만 할 뿐이고 계속 아픈데도 낫질 않잖아.” 맞는 말이다.


늙어감 없이 젊게만 살다가 떠날 수 없다면, 떠나는 날을 미리 알 수 있기만 해도 좋으련만. 들린다. 당신은 10년 뒤에 죽습니다. 내가 말한다. 오, 감사합니다. 걱정 없이 삶을 즐길 수 있겠어요!  장난이고요. 당신은 70년 뒤에 죽어요. 아니… 이건 모르고 사는 거랑 똑같잖아요!  역시 최고의 시나리오는, 삼키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알약을 소지한 상태로 재밌게 살다가 삶의 저울이 고통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는 순간 그 알약을 삼키고 끝내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알약은 구할 길이 없을 터, 외국인도 받아준다는 스위스 안락사 단체를 검색해 보기에 이르렀는데, 얘네도 죽을 병 걸린 거 아니면 안 받아준다고 하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는 1968년에 발간되었고, 『자유죽음』은 1975년에 발간되었다. 이후 그는 1978년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했다(요새 나오는 수면제는 100알을 목구멍에 털어도 안 죽는다). 저자의 삶의 이력을 아는 채로 『늙어감에 대하여』를 읽노라니 내내 든 생각. ‘어휴 인간아… 늙어감에 대해 이렇게까지 골몰하니 자살할 수밖에 없지. 어차피 다 늙고 죽는 거….’


초판 서문에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물음은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시간을, 자신의 몸을, 사회를, 문명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점이다.”(6쪽)라고 적혀 있듯이, 이 책은 늙어가던 장 아메리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고 체험하고 해석한 것들을 가감없이 치열하게 적어내린 결과물이다. 여기에 노년기의 평안이나 지혜,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 따위는 없다. 있었다면 저자가 자유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지도 않았을 터다. 내가 장 아메리라면 스스로의 지성과 필력에 취해서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 책의 존재는 정희진의 저서로부터 알았는데, 정희진은 독후감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나이듦을 느끼는 독자들에겐 쉽고 깊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물론 ‘이미 알고 있어요.’라고 말할 젊은이들은 없을 것이다.” 어떤 젊은이는 이 책을 읽고서 늙어감이 이렇게나 씁쓸한 것이로구나, 내 젊음을 소중히 여겨 열심히 살아야지,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다른 젊은이의 한숨. 에휴 시발 어차피 다 늙고 죽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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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8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8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8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8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청아 2023-07-28 2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코씨의 말 좋았는데 사노 요코의 저런 태도 멋있네요?!!

은오 2023-07-28 21:40   좋아요 1 | URL
사실 사노 요코 에세이 집어들었다가 음 기대보단 별로네.. 하면서 읽었거든요? 근데 거의 마지막 즈음에 나온 저 부분에서 저도 멋있다 했던 터라 기억이 딱 나더라고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3-07-28 21: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늙어감에 대해 읽는 젊은이라니. 너무 멋지네요. 은오 님 처럼 똑똑이들은 정말 부지런히 읽고 써줘야 합니다. 제가 은오 님 글 다 읽을게요!! 😤

은오 2023-07-28 22:02   좋아요 1 | URL
존재자체가기적짱멋진다락방님 부지런히 읽을 순 있지만 부지런히 쓰지는 못하는 젊은이.. 다락방님을 위해 쓰기에도 부지런해져보겠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3-07-28 2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은 아메리의 지성과 필력을 갖추게 되기를 다락방과 함께 응원합니다.

은오 2023-07-28 23:36   좋아요 2 | URL
결혼도 안해주시면서 부활하시자마자 은오 서재에 가장 먼저 찾아와 하트 폭탄 날리면서 절 설레게하시는 밀당고양이 잠자냥님의 응원 감사히 받겠습니다. ㅋㅋㅋㅋㅋ 😍

꼬마요정 2023-07-28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 은오 님은 참 멋져요 ㅎㅎㅎ 저는 꼬꼬마 때 18살까지만 살다가 아름다울 때 죽을 거야!! 라고 철없이 떠벌렸더랬죠. 18살이 되니까 그냥 서른 까지 살까? 하다가 이제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생이 허락하는 한 살아갈 것 같아요. 물론 미래는 알 수 없지만요. 치매로 고생하시던 친할머니의 경우, 제 막내동생이 결혼하는 건 보고 죽어야지 그러셨죠... 할머니랑 막내랑 나이 차이가 일흔 살 정도거든요.... ㅎㅎㅎ 사노 요코의 태도랑 다르지만, 이해는 가요. 할머니는 엄마, 아빠가 부양하고 있었으니까요.... 나이 들어서 조금이라도 덜 힘들려면 젊어서 고생해야 하다니... 너무 슬프네요. 일 하기 시러...ㅠㅠ 왜 우리 엄빠는 부자가 아닌 걸까요... (이런 심오한 글에 이런 결말이라니... 역시 전 속물이에요ㅜㅜ)

은오 2023-07-29 15:10   좋아요 1 | URL
요정님 읽어주셔서, 긴 댓글도 감사해요! 아니 그건 철없는 꼬꼬마들이 다 거쳐가는 과정인가 봐요! ㅋㅋㅋㅋ 저도 그랬어요 ㅎㅎㅎ 그리고 저도 사노 요코도 요정님 친할머니분도 다 이해가 됩니다. 결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빠 ㅠㅠ 요정님 결말이 사실 제 결말입니다요! ㅋㅋㅋㅋ 일하기 시러.. 건물주가 되고싶다.. 😥

호시우행 2023-07-29 0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에선가 이런 글쓰기 스타일을 여러 차례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분인가 싶기도 해요. 아무튼 늙어보면 늘 남는게 아쉬움이죠. 젊을 때 더 해 볼걸~~ 하지만 정작 젊었을 땐 그렇게 하지 않았죠. 내가 무슨 수행자도 아닐진대 왜 그렇게 금욕생활을 했는지 ㅎㅎ. 그냥 하루하루 매순간 열심히 사는 게 늙은이의 삶 아닐까? 내 몸을 이기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나도 곡기를 끊고 조용히 숨을 거두리라고.... ㅣ

은오 2023-07-29 15:06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님~! 또 뵈니 뭔가 반갑네요! 😆 그런가요?! 어떤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ㅎㅎㅎ
호시우행 님은 금욕생활을 하셨군요. 저는 막 살았는데 그것도 후회되더라고요. 금욕생활도 후회되고 부절제한(?) 생활도 후회되면 정말 결국 어떻게 살든지 나중엔 다 아쉬운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ㅠㅠ

새파랑 2023-07-29 0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언제 죽을지 알면 괜찮을거 같다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ㅋ

아 나이들고 늙어가는거 너무 싫습니다 ㅜㅜ

은오 2023-07-29 15:07   좋아요 1 | URL
그쵸? 언제 가는지라도 알면 좀 나을 텐데요. ㅋㅋㅋㅋㅋ 저도요!!!!! 🤧😫
새파랑님.. 저랑 알라딘에서 같이 늙어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23-07-29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오 님, 글 잘 쓰십니다. 술술 읽히고 시원하게 읽히고... 죽음에 대한 성찰의 책을 읽은 게 두 권쯤 생각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어요. 늙어감에 대하여, 를 봐야겠네요. ^^

은오 2023-07-29 15:23   좋아요 0 | URL
페크님!! 정말요?! 😱😆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늙어감에 대하여> 정말 좋았어요. 이 책 페크님께는 어떨지 궁금해요!! 😀

자목련 2023-07-31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은 ❤️❤️❤️❤️❤️
백자평에 이어 이렇게 좋은 글을 써주는 은오 님!
친구와 지인의 안부에 저는 종종 늙고 있어 라고 말해요. ㅎㅎ
어느 순간부터 늙는 게 나쁘지 않구나 느끼고요. 그래서 늙음, 몸의 신호, 죽음 같은 생각에 골몰하는 건 피하고 있어요. 은오 님은 아직 모르겠지요? ㅎ

잠자냥 2023-07-31 10:35   좋아요 1 | URL
은오 님은 언니들 마음 여는 재주가 뛰어나긴 한가 봅니다. 자목련 님이 서재에서 이렇게 하트 많이 보내는 거 은오 님 등장 이후 처음 봄. 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7-31 14:01   좋아요 0 | URL
저도 우선은 ❤️❤️❤️❤️❤️❤️❤️❤️❤️❤️❤️❤️❤️❤️❤️❤️❤️
자목련님의 “백자평으로 끝인가요?”를 계속 상기하면서 오랜만에 긴 글을 겨우 써봤습니다 (ㅋㅋㅋ)
네 자목련님, 음.. 아직은 확연히 느껴지진 않는 것 같아요. 저도 나쁘지 않네~ 하면서 살아야겠어요!! 그리고 골몰해봐야 답이 없는건 그냥 피하고 잊는 게 최고! 맞습니다!! 💕

은오 2023-07-31 14:04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저는 자목련님이 원래 막 하트뿅뿅 사랑이 넘치고 다정한 분인 줄 알았는데 이런 댓글 읽을때마다 아니 대체 자목련님은 원래 어떤분....?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영광이에요 자목련님!!!!!! (뽀뽀)

근데 잠자냥님의 마음은 언제 열리나요? 이미 열렸나요?! 사실 안열려도 그냥 맘대로 부수고(?) 들어갈 생각이긴 합니다만....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7-31 14:36   좋아요 1 | URL
은오 / 열린교회 닫힘

은오 2023-07-31 15:37   좋아요 2 | URL
거기 사실 열려있다던데.. 아십니까? 잠자냥님의 마음도 사실 절 향해 활짝 열려있는게 아닌지....?! 의심스럽군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7-31 16:50   좋아요 2 | URL
은오/ 열린교회 닫힘 영구폐쇄

은오 2023-07-31 16:49   좋아요 2 | URL
폐쇄아니고 페쇄라고하신거 부러 여지를 남겨두신걸로 알겠습니다

잠자냥 2023-07-31 16:50   좋아요 1 | URL
이눔의 손가락!!

자목련 2023-08-02 08:39   좋아요 1 | URL
음,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군요 ㅎ

은오 2023-08-02 18:33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은 원체 단정하고 다정한 분이시지만 하트는 저한테만 해주시는걸로.. 왜냐면.. 질투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