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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초판본, 양장)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제법 너그러운 인간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변화를 새삼스레 실감할 때면 속으로 어머, 나도 이제 어른? 하면서 혼자 피식대기도 하고. 원체 트러블을 만들기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내가 가진 자기연민을 인간연민으로 화했다는 점의 공이 크리라. 저 인간도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랬겠지, 하며 한 번 참는 거다. 인간은 참 불쌍해. 왜, 힘이 없기 때문이지. 삶에서 제힘으로 지켜내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사소한 것들 뿐이고, 더 거대한, 필연적인, 고통과 시련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인간은 불쌍하고 인간의 삶은 처량하다.
《스토너》를 읽노라니 이 생각이 한결 확고해졌다. 이 소설이 인간의 삶을 더없이 착실하게 그려낸 소설이라서. 주인공 스토너가 열 아홉의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대학에 진학한 순간부터 방에서 홀로 생의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말이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을 읽고 평범한 인간의 삶도 들여다 보면 저마다 의미 있고 아름답다며 찬탄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내내 씁쓸해져 죽고 싶었다.
책 말미의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저자 존 윌리엄스는 이 소설을 슬프다고 생각하는 독자의 반응에 놀랐으며, 주인공 스토너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고 했단다. 스토너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스토너는 늦지 않은 시기에 적성을 찾았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 평생토록 곁에 두고 살 수 있었던, 어쩌면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제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과 타인 앞에서, 가까운 사람과 자신의 나이듦과 죽음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맥을 쓰지 못하는, 공평하게 운이 나쁜 인간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 평범하고 불쌍한 인간이 삶을 살아내며 겪는 무력함과 그로 인한 슬픔을 고스란히 그려 보였고.
지금 나의 시점에서 가장 사무치게 와 닿는 요소는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람의 나이듦과 죽음이다. 이제 부모님의 염려를 받기만 해도 되는 맘 편한 시절은 지났고, 만날 때마다 어째 저번보다 훨씬 더 늙은 것처럼 보이는 부모님이 염려되는 나이다. 스토너와 그의 부모, 스토너와 그의 딸 그레이스. 아빠가 암 수술을 한 이후 어느 날, 나를 보더니 뜬금없이 많이 컸다는 소리를 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 스토너가 그레이스를 보며 어릴 적 자신의 서재에서 놀던 어린 아이와 그 찬란한 순간을 떠올린 것처럼, 아빠도 나를 보면서 이따금 어린 시절의 나와 함께한 순간들을 떠올릴까.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인데, 아름다운 기억이 남아 있다는 건 저주 같다. 그리워하느니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그럼에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들이 인간을 살게 했다는 것. 불쌍한 인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처량한 삶을 살아내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이 소설은 열정이라고 대답한다. 문학에게, 딸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열정을 쏟은 스토너처럼, 열정을 쏟을 대상이 있어야 인간은 살 수 있다고. 쏟을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지나고 보면 그 덕에 살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렇게 정신과 마음을 내주다 보면 삶은 너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가 있는 것이라고.
사실 나는 스토너가 강사가 된 시점부터 미드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의 얼굴로 상상이 되었는데, 왜 그렇게 된 건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스토너는 월터와는 굉장히 다른 유의 유약한 인간이거니와, 둘의 공통점이라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는 것뿐인데. 게다가 월터는 드라마 초반부터 마약 제조업자의 길로 들어선다. 열정이 꺾여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월터도 여기서 열정을 찾기는 했지. 그 대상이 파멸적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월터와 스토너를 보면 열정의 대상에도 위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스토너의 삶만 따로 떼어 보아도 그렇다. 딸과 사랑하는 이가 머무른 순간은 짧았고, 그의 삶을 내내 지키며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 것은 오로지 문학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떤 대상에게 마음을 내주며 살았고, 어떤 대상에게 마음을 내주며 살게 될까. 처량한 삶을. 어울리진 않았지만 주인공 캐스팅은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였고, 다 읽고 나서 떠오른 이 소설의 OST는 이소라의 <Track 9>였다(곡 제목이 Track 9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