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울 수 없으면 실외다
"누울 수 없으면 실외다." 근래 들어 본 문장 중에 가장 웃기면서 통렬하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단숨에 그 함의가 파악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울 수 없으면 실외다. 그러니까 내가 머물고 있는 장소가 원칙적으로는 실내일지언정, 누울 수 없다면 그 장소는 나에게 실외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회사, 강의실, 식당, 영화관 등은 당연히 누울 수 없으니 실외라는 것.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같은 직장인이라도 "주중에는 내내 회사(원칙적으로 실내)에 있었으니 주말에는 어디 놀러가고 싶다"는 사람이 존재하는 반면에, "주중에는 내내 회사(누울 수 없으니 실외)에 있었으니 주말에는 집에서 뒹굴고 싶다"는 사람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주말에 손님이 내 집에 와서 자고 간다고 생각해 보자. 그 손님이 가족, 친한 친구, 연인 정도의 친밀함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리 내 집이라 해도 편히 누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경우, 내가 주말 내내 실제로 머문 장소는 집이더라도, 결국 주말 내내 외출한 셈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드는 문장이지만 완벽한 문장은 아니다. 이 문장을 나에게 완전히 부합하도록 고치면, "혼자가 아니면 실외다" 정도가 되겠다. 곰곰 생각해 보면, 나는 가족들과 한 집에서 살 때도 주로 내 방에 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타입이었고, 부모님이 길게 여행이라도 가시는 날이면 진정한 행복감을 느꼈다. 부모님의 부재에 마음 놓고 기행을 벌인다든지 했던 것도 아니면서 그저 집에 오롯이 혼자 있음을 즐겼던 것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므로 혼자 산 지 벌써 5년 가까이 된 지금은 혼자 있다는 상태만으로 행복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타인과 이틀 이상을 보내고 온 날이면 혼자 있음의 행복을 절감할 수 있다. 여기서 나에게 '타인'이란 사전적 의미의 타인인 것이요 바로 나 빼고 모두다. 엄마건 연인이건 친구건 전부 얄짤 없다. 이러니 본가에 갈 때마다 두 밤 이상 자고 오기가 너무 힘들더라. 부모님과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닌데 본가에 오래 있으면 갑갑해져서 하루만 자고 가려니까 부모님이 매번 너무 섭섭해 한다. 갑자기 이걸 쓰고 보니 엄빠한테 미안해졌다. 이번 설에는 두 밤 자고 와야겠다.
바야흐로 비혼주의자가 특이종이라는 딱지로부터 벗어난 시대다. 요즘 비혼을 선언하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나의 경우는 '중간에 이혼을 하지 않는 한 평생 누군가와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다. 진정 이게 말이 되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 남자가 집을 나가지 않는 이상, 내가 집을 나가지 않는 이상, 남자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지 않는 이상, 아침에 눈을 뜨면 내 집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괴롭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온기와 냄새는 약속을 잡고 밖으로 나가서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내 집에서는 싫다.
2. 엄마의 방
책 속의 문장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독자에게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어떤 문장은 내가 평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찾을 실마리를 제공하고, 어떤 문장은 평소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좀 생각하라며, 나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다른 공간으로 던져 버리기도 한다. "수잔은 집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려고 남은 방 하나를 '엄마의 방'으로 개조한다. 그러나 '엄마의 방'은 곧 가족들 모두가 사용하는 방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수잔은 싸구려 호텔을 하나 빌려서 사적 공간을 만듦으로써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수잔은 점점 더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된다."(페미니즘 이론과 비평, 49쪽) 이 네 문장이 나를 던졌다.
본가에는 거실과 부엌을 제외한 방이 세 개 있다. 하나는 내 방, 하나는 동생 방, 하나는 안방 겸 가족들 모두가 사용하는 방이다. 이사를 몇 번 하기도 했지만, 내 기억이 닿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와 동생은 각자의 방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방이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을 때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인데, 여자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자기만의 방이 긴실하다는 점 또한 알고 있었는데, 저 문장들을 읽고서야 "엄마는 괜찮았을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괜찮았을 리 없다. 내가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엄마가 나에게 이따금 그랬다. 부럽다, 엄마도 방 하나 얻어서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겉으로는 아주 엄마 아빠 바보가 따로 없다. 어릴 때부터 명절에 할머니 댁에 가면 요리하는 엄마 앞치마만 붙잡고 졸졸 따라다녔고, 어딜 가든 엄마 뒤에 딱 붙어 있어서 엄마 껌딱지라는 소리를 왕왕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내가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엄마에게 카톡을 보내는 일이다. 별 내용은 없다. 그냥 이모티콘 3개를 연속으로 보내면서 나 일어났다고 엄마한테 알리는 거다. 엄마가 답장을 안 하면 강아지가 책상을 쾅 치면서 씩씩대는 이모티콘을 5개쯤 더 보낸다. 요즘은 오후에 일어나서 딱히 상관이 없지만, 규칙적으로 생활할 필요가 있는 시기에는 아침 6시쯤 일어나는데, 엄마가 주말에도 6시에 카톡 카톡 카톡 소리를 들을 것이 조금 불쌍해서 주말은 8시로 바꿔줬다. 자기 전에 아빠랑 통화는 필수다. 요즘 아빠가 전화할 때마다 하는 말이 "용건만 간단히"인 걸 보면 조금 귀찮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엄마랑 아빠한테 나보다 늦게 죽으라는 말도 종종 한다. 그러면 예전에는 그게 부모한테 할 소리냐는 대답이 날아왔는데, 요즘은 그냥 알았다고 하는 걸 보면 엄마랑 아빠도 받아들인 것 같다.
문제는 이러면서도 평소에는 부모님 생각을 좆도 안 한다는 거다. 어쩌면 부러 차단기를 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의 입장이 되어보고자 결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건 상당한 에너지롤 요하는 일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아이유의 할머니가 이선균의 친절과 도움을 받은 후, 아이유에게 이선균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은 아이유가 "잘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 되기 쉬워."라고 했던 게 이런 의미일 것이다. 작가도 '잘 사는 사람'을 '금전적으로 넉넉한 배경을 가진 사람'만으로 한정하지는 않았으리라. 요지는, 남에게 마음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쏟고도 남는 마음의 여유분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3. 외로움
예전에는 참 많이도 주변 사람들에게 힘들다고 징징댔다. 그러다가 결국 그 못난 버릇을 제대로 고치게 된 동인은, 내가 반대로 타인의 힘듦을 들어주는 입장이 되어 본 경험이다. 어느 시점에 친구가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는데,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 주다가 나중에는 그 역할이 버거워서 서서히 연락의 빈도를 줄였다. 지금도 이때를 생각하면 양가감정이 든다. 나도 힘든데 친구의 힘듦을 받아주는 건 무리였어,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친한 친구였는데 나는 그 친구에게 더 잘해줬어야 했어, 하는 거다. 어쨌든 그 이후로 아, 힘듦을 말하는 건 들어주는 사람의 맥을 쪽쪽 빨아먹는 일이구나, 하면서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외롭다는 감정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건, 단순히 곁에 사람이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나는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것은 이해하는 척만 할 수 있을 뿐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세상에 혼자 던져진 것만 같고, 타인에게 나의 슬픔을 말해봤자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욱이 사람은 밝은 사람에게 끌리게 마련, 어두운 캐릭터는 문학이나 영화에서나 매력적인 것이지 현실에서는 멀리하고 싶은 상대일 뿐이다. 그러니 다들 이렇게 가면을 쓰고 사는 수밖에.
4. 의무
우리는 꼭 타인의 슬픔에 다가가고자 노력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누군가는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까다로운 질문이고, 머릿속 한 구석에 똬리를 틀은 채 내내 박혀 있는 질문이다. 일단은 쉬이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세월호건 이태원이건 누가 자살했다는 소식이건 들으면 놀랄 뿐이지 슬프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의도적으로 차단기를 올리고 마음을 써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는 건 보류다.
최근에 읽은 문장이 깨달음 하나를 줬다. 이건 위에서 말한 책 속의 문장이 주는 영향에서 전자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8쪽)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의무로 여겨야 할 것이다. 말마따나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을 공부하는 일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5. 북플
보니까 여기는 주말보다 주중에 더 활발하다. 북플아 너는 월급루팡과 현실도피에 이용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