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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로버트 P. 크리즈 지음, 김명남 옮김 / 지호 / 2006년 8월
평점 :
나는 지금부터 비유를 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실험들을 예술작품에 비유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비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러한 비유가 쓰잘데 없고 엉뚱한 끼워 맞추기일 뿐이라고 생각하였을 터이다. "... 예언과 청취의 차이, 일차적 발견과 이차적 전파의 차이, '이것은 이렇다'고 말하는 것과 '이것은 저것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의 차이가 사실상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구절을 보고는, 어쩌면 특정한 실험을 대할 때의 느낌이 특정한 예술작품을 대할 때의 느낌에 대응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실험과 예술작품, 그 둘의 형식과 내용은 비교가 힘들 정도의 엄청난 이질성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심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비유를 시작해보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 - 강박적인 완벽주의자 스탠리 큐브릭이 창조해 낸 숨막힐 정도로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영화.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태고적부터 존재해 왔다는 듯이 유유히 떠다니는 우주선을 씨네마 스코프(2.35:1) 화면비에 꽉차게 표현하였는데, '모노리스'가 일렬로 늘어선 행성과 나란히 위치하면서 태양빛을 번쩍일 때 울려퍼지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팡파레의 압도적인 숭고함이 강렬한 기억을 남긴다. 이 때의 압도적인 숭고함은 '푸코의 숭고한 진자'에서도 그대로 살아 있어서, "심지어는 인간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은이의 말이 글자그대로 영화와 실험 양쪽에서 공감을 일으킨다. "움직이지만 사실 움직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는 지은이의 말은 푸코의 진자와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광활한 우주 공간 모두에서 압도적인 진실이 된다.
영화에서 깨달음의 여명을 상징하는 모노리스는 책의 곳곳에 현현하여 드러난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 재기'에 사용된 해시계 바늘,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사탑의 전설'), '푸코의 숭고한 진자', 심지어는 빛 또는 전자의 간섭 현상을 실증하기 위한 이중 슬릿('영의 빛나는 은유', '단독 전자의 양자적 간섭')까지도 모노리스의 무표정하지만 빛나게 우뚝 선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초월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그때까지의 좁은 틀 속의 사고에서 자그마한 해방구가 터지고, 이를 통해 사상이 초월의 문턱으로 접어드는 순간, 숭고한 '차라투스트라'의 팡파레의 전율과 함께 급작스럽게 다가오는 깨달음의 지표들이자 도구들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상 씨네마 스코프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 중 하나라고 인정받고 있는데, 씨네마 스코프 화면비의 장엄함은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 재기'나 '푸코의 숭고한 진자'같은 우주적 스케일의 실험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은 물론이다.
피아노 협주곡 20번 (W.A. 모차르트) - 어떤 예술작품이 순수감정을 불러 일으킬 때 아름다움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데, 모차르트의 음악은 바로 그 순수감정 자체라 할 만하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오직 순음악적 표현만으로 깊은 단순성에 기초한 투명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거기에다 달콤한 우울을 가미했다. 그러나 그 본질이 단순하고 투명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차르트의 천재는 '이 정도에서 하나의 악구가 끝나리라'는 우리의 예상을 두어번 뛰어 넘는 고도의 치밀함으로 그 작품의 외형을 감싸고 있다. 극도의 치밀함의 전형이라 할만한 '캐번디시의 엄격한 실험'은 모차르트의 작품처럼 엄청나게 정교한 부분들 또는 행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구절은 혀를 내두르는 그 치밀함의 일면을 보여준다. "5센티미터 지름의 금속 공이 지구의 자기장 속에 일정한 방향으로 오래 놓인 탓에 약간이라도 자성을 띠게 되었을까봐 주기적으로 두 공의 위치를 교대해주었고, 정말 자성이 연관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알기 위해 공을 자석으로 교체해 실험해보기도 했다."
게다가 캐번디시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경박한 웃음이 상징하는 천재적 기이함으로 뭉친 인물었는데, 그의 경우에 그 기이함은 극도의 대인기피증이었다. "한번은 실수로 계단에서 가정부와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그는 곧바로 뒤편에 층계를 하나 더 만들어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캐번디시와 같은 기인들은 과학자들 중에서 얼마든지 많으며, 나와 같은 범인은 이러한 기벽을 접하면서 커피향 섞인 달콤한 우울감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천재적 우울'이 이와 상통한다.
만델브로트 집합 (베노이트 만델브로트) -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델브로트 집합이 이루는 기묘한 그래픽을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는 데에 의아해하거나 불편해할 것이다. 하지만 만델브로트 집합은 분명 현대의 컴퓨터 그래픽 예술장르와 맞닿아 있으며, 프랙탈 그래픽의 이데아라는 점에서 나에게는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여겨진다. 또한 만델브로트 집합보다 과학실험의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소 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나는 이 글에서만큼은 만델브로트 집합을 예술작품의 하나로 보기로 했다.
만델브로트 집합은 컴퓨터 모니터 상에 그 일부를 확대해 갈수록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패턴을 만나게 되어 있는데, 그 끝없이 광활한 이국적 기하 그래픽이 실은 아주 단순한 비선형 수식 하나에서 도출된다는 점에서, 광학이라는 거대한 무지개를 도출해 낸 '뉴턴의 프리즘 빛분해'나, 양자역학이라는 확률적 간섭무늬의 신천지를 선구적으로 엿보게 해 준 '영의 빛나는 은유' 등의 단순한 실험들과 미적 유사성이 있다. 우리가 마우스를 이용하여 만델브로트 집합의 일부를 확대할 때마다 그 단순한 수식이 내포하고 있는 끝없는 아름다움에 놀라는 것처럼, 입자의 파동성, 불확정성 원리, 슈뢰딩거의 방정식 등 수없이 기묘한 양자역학의 이론 세계를 빛 한줄기로 수십년 전에 미리 맛보게 해 준 영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도 우리는 그 단순한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폭포 (M.C. 에셔) -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그 유명한 '괴델, 에셔, 바흐'에서 '이상한 고리(strange loop)'의 회화적 표현으로 소개되었던 에셔의 판화이다. 수로를 따라 흐르던 물은 이윽고 수로의 끝에서 폭포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데, 기묘하게도 그 떨어진 물은 다시 예전의 수로를 따라 아래로 흐른다. 이는 우리가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또는 알고 있으면서도 시각화하기 힘든 과학적 사실에 대한 놀라운 비유이다. 이 책에서 그러한 과학 실험의 가장 좋은 예를 든다면, 당연히 그것은 '단독 전자의 양자적 간섭'이 될 것이다. "그 실험을 [대학에서] 보기 전만 해도 나는 '현대'[20세기] 물리학이 주장하는 바를 단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고 한 과학자가 고백했을 만큼 직관과 어긋나는 결과를 마술처럼 보여주는 이 실험의 아름다움은 에셔가 추구했던 수학적 기괴함과 그 미학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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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4악장으로 이루어진 '실험을 비유하는 예술작품 모음곡'이었다.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고 가당치도 않은 비유일 수도 있지만, 훌륭한 과학실험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경험이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약간이나마 느끼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책은 열 가지의 실험을 설명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했고, 나의 경우에는 그것을 예술작품에의 비유를 통하였다는 것만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비유가 전혀 쓸데 없는 짓만은 아니리라는 용기 내지는 호기 또한 이 책에서 얻었음을 다시금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