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4/25에 수유+너머에서 있었던 박노자 선생의 강의 후기.

------------------------------------------------

 

지난 이틀간 레닌과 트로츠기의 관점으로 러시아 혁명과 현재를 보는 행운을 얻었다. 그것은 20세기가 시작될 즈음 가장 유명한 혁명가 두 명의 논리와 이상에 푹 담궈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결과는 의외로 충격적이어서 집으로 가는 내내 강남대로 주변의 딴딴한 빌딩들이 마치 과자로 지은 듯 위태하게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 딴딴한 강남 빌딩들이 왜 녹아내렸을까? 나의 저열한 인식체계는, 박노자 선생이 한국인 보다 더 유창한 한국어로 조성한 레닌-트로츠키 가상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사이버 세계에서 외부로 자연스레 방사되는 자본주의-무력화-광선이 빌딩을 용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나의 환상속에 레닌-트로츠키의 가상세계가 구축되었다. 박노자 선생의 굉장히 적확한 한국어 구사능력과 카스트라토의 하이톤을 연상시키면서도 사람을 깨어 있게 만드는 감칠스러운 음성에, 내 정신세계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와 같이 '나도 아니고 레닌-트로츠키도 아닌' 모호한 불확정성의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상세계는 임박한 자본주의의 종언과 그후에 따라 올 야만의 시대에 대한 묵시론적 예언이 있은 후, 현실세계와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강남대로의 빌딩이 봄볓아래 놓인 얼음조각처럼 녹아내렸음은 물론이고, 버스 옆좌석에서 휴대전화로 애인과 잡담하던 한 아가씨의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자본주의 종말의 징후를 나타내는 예언적 환청으로 변하여 귀에 꽃혔다.

그러나 자기 파멸적인 레닌-트로츠키 되기는 영속할 수 없었다. 그런 분열증적 환상의 0.5초 후에는 어김없이 편집증적 회의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레닌은 레닌이고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일 뿐이며, 그들 사상의 한계, 그리고 그로 인한 현실 사회주의의 소멸의 역사는 무기력한 편집증적 우울증이 20세기 초반에서 21세기 초반인 현재까지를 대표하는 좌파의 지배적인 정서라고 역설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정서를 극한까지 몰고 갈 스탈린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약 1초간의 좌파적 조울증을 겪고 난 후,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나는 안심했다. 내가 레닌에 대해, 트로츠키에 대해, 좌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도대체 무얼 알고 있던가? 진정 나의 앎이 미래에 대한 광적 열망이나 잿빛 자살로 이어질만큼 절대적인가? 내 손바닥위에 빨간약과 파란약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박노자 선생을 통해 확실히 확인하게 된 것 뿐. 다가올 진보적 미래에의 외삽을 위해서 필요한 많은 변수들 중에 어제 오늘 강의로 내 손에 얻게 된것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사진 몇 장일 뿐이다. 그 사진들의 힘이 로버트 카파의 '병사의 죽음'처럼 논쟁적이지만 엄청나게 강렬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스탈린-되기를 거친 후에는 나에게 어떤 환상이 찾아올까? 기대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딸기 2007-04-27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만입니다!!!

전자인간 2007-04-2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딸기님!
댓글저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로버트 P. 크리즈 지음, 김명남 옮김 / 지호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지금부터 비유를 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실험들을 예술작품에 비유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비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러한 비유가 쓰잘데 없고 엉뚱한 끼워 맞추기일 뿐이라고 생각하였을 터이다. "... 예언과 청취의 차이, 일차적 발견과 이차적 전파의 차이, '이것은 이렇다'고 말하는 것과 '이것은 저것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의 차이가 사실상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구절을 보고는, 어쩌면 특정한 실험을 대할 때의 느낌이 특정한 예술작품을 대할 때의 느낌에 대응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실험과 예술작품, 그 둘의 형식과 내용은 비교가 힘들 정도의 엄청난 이질성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심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비유를 시작해보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 - 강박적인 완벽주의자 스탠리 큐브릭이 창조해 낸 숨막힐 정도로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영화.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태고적부터 존재해 왔다는 듯이 유유히 떠다니는 우주선을 씨네마 스코프(2.35:1) 화면비에 꽉차게 표현하였는데, '모노리스'가 일렬로 늘어선 행성과 나란히 위치하면서 태양빛을 번쩍일 때 울려퍼지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팡파레의 압도적인 숭고함이 강렬한 기억을 남긴다. 이 때의 압도적인 숭고함은 '푸코의 숭고한 진자'에서도 그대로 살아 있어서, "심지어는 인간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은이의 말이 글자그대로 영화와 실험 양쪽에서 공감을 일으킨다. "움직이지만 사실 움직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는 지은이의 말은 푸코의 진자와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광활한 우주 공간 모두에서 압도적인 진실이 된다.

영화에서 깨달음의 여명을 상징하는 모노리스는 책의 곳곳에 현현하여 드러난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 재기'에 사용된 해시계 바늘,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사탑의 전설'), '푸코의 숭고한 진자', 심지어는 빛 또는 전자의 간섭 현상을 실증하기 위한 이중 슬릿('영의 빛나는 은유', '단독 전자의 양자적 간섭')까지도 모노리스의 무표정하지만 빛나게 우뚝 선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초월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그때까지의 좁은 틀 속의 사고에서 자그마한 해방구가 터지고, 이를 통해 사상이 초월의 문턱으로 접어드는 순간, 숭고한 '차라투스트라'의 팡파레의 전율과 함께 급작스럽게 다가오는 깨달음의 지표들이자 도구들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상 씨네마 스코프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 중 하나라고 인정받고 있는데, 씨네마 스코프 화면비의 장엄함은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 재기'나 '푸코의 숭고한 진자'같은 우주적 스케일의 실험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은 물론이다.

피아노 협주곡 20번 (W.A. 모차르트) - 어떤 예술작품이 순수감정을 불러 일으킬 때 아름다움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데, 모차르트의 음악은 바로 그 순수감정 자체라 할 만하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오직 순음악적 표현만으로 깊은 단순성에 기초한 투명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거기에다 달콤한 우울을 가미했다. 그러나 그 본질이 단순하고 투명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차르트의 천재는 '이 정도에서 하나의 악구가 끝나리라'는 우리의 예상을 두어번 뛰어 넘는 고도의 치밀함으로 그 작품의 외형을 감싸고 있다. 극도의 치밀함의 전형이라 할만한 '캐번디시의 엄격한 실험'은 모차르트의 작품처럼 엄청나게 정교한 부분들 또는 행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구절은 혀를 내두르는 그 치밀함의 일면을 보여준다. "5센티미터 지름의 금속 공이 지구의 자기장 속에 일정한 방향으로 오래 놓인 탓에 약간이라도 자성을 띠게 되었을까봐 주기적으로 두 공의 위치를 교대해주었고, 정말 자성이 연관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알기 위해 공을 자석으로 교체해 실험해보기도 했다."

게다가 캐번디시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경박한 웃음이 상징하는 천재적 기이함으로 뭉친 인물었는데, 그의 경우에 그 기이함은 극도의 대인기피증이었다. "한번은 실수로 계단에서 가정부와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그는 곧바로 뒤편에 층계를 하나 더 만들어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캐번디시와 같은 기인들은 과학자들 중에서 얼마든지 많으며, 나와 같은 범인은 이러한 기벽을 접하면서 커피향 섞인 달콤한 우울감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천재적 우울'이 이와 상통한다.

만델브로트 집합 (베노이트 만델브로트) -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델브로트 집합이 이루는 기묘한 그래픽을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는 데에 의아해하거나 불편해할 것이다. 하지만 만델브로트 집합은 분명 현대의 컴퓨터 그래픽 예술장르와 맞닿아 있으며, 프랙탈 그래픽의 이데아라는 점에서 나에게는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여겨진다. 또한 만델브로트 집합보다 과학실험의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소 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나는 이 글에서만큼은 만델브로트 집합을 예술작품의 하나로 보기로 했다.

만델브로트 집합은 컴퓨터 모니터 상에 그 일부를 확대해 갈수록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패턴을 만나게 되어 있는데, 그 끝없이 광활한 이국적 기하 그래픽이 실은 아주 단순한 비선형 수식 하나에서 도출된다는 점에서, 광학이라는 거대한 무지개를 도출해 낸 '뉴턴의 프리즘 빛분해'나, 양자역학이라는 확률적 간섭무늬의 신천지를 선구적으로 엿보게 해 준 '영의 빛나는 은유' 등의 단순한 실험들과 미적 유사성이 있다. 우리가 마우스를 이용하여 만델브로트 집합의 일부를 확대할 때마다 그 단순한 수식이 내포하고 있는 끝없는 아름다움에 놀라는 것처럼, 입자의 파동성, 불확정성 원리, 슈뢰딩거의 방정식 등 수없이 기묘한 양자역학의 이론 세계를 빛 한줄기로 수십년 전에 미리 맛보게 해 준 영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도 우리는 그 단순한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폭포 (M.C. 에셔) -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그 유명한 '괴델, 에셔, 바흐'에서 '이상한 고리(strange loop)'의 회화적 표현으로 소개되었던 에셔의 판화이다. 수로를 따라 흐르던 물은 이윽고 수로의 끝에서 폭포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데, 기묘하게도 그 떨어진 물은 다시 예전의 수로를 따라 아래로 흐른다. 이는 우리가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또는 알고 있으면서도 시각화하기 힘든 과학적 사실에 대한 놀라운 비유이다. 이 책에서 그러한 과학 실험의 가장 좋은 예를 든다면, 당연히 그것은 '단독 전자의 양자적 간섭'이 될 것이다. "그 실험을 [대학에서] 보기 전만 해도 나는 '현대'[20세기] 물리학이 주장하는 바를 단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고 한 과학자가 고백했을 만큼 직관과 어긋나는 결과를 마술처럼 보여주는 이 실험의 아름다움은 에셔가 추구했던 수학적 기괴함과 그 미학을 공유한다.

         *   *   *

지금까지 4악장으로 이루어진 '실험을 비유하는 예술작품 모음곡'이었다.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고 가당치도 않은 비유일 수도 있지만, 훌륭한 과학실험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경험이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약간이나마 느끼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책은 열 가지의 실험을 설명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했고, 나의 경우에는 그것을 예술작품에의 비유를 통하였다는 것만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비유가 전혀 쓸데 없는 짓만은 아니리라는 용기 내지는 호기 또한 이 책에서 얻었음을 다시금 밝힌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기 2006-11-06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거 재밌나요? 신문 북리뷰에서 제목만 봤는데... 전자인간님이 리뷰를 올리셨으니 함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마구마구 드네요.

전자인간 2006-11-06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처럼 많은 과학책을 읽는 분들에게는 별반 새롭거나 충격적인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딸기님이 좋아하시는(저도 좋아합니다) 브라이언 그린류의 과학책은 아니라는 말씀. 하지만 과학(실험)사와 미학의 기묘한 결합에 흥미가 동하신다면, 좋은 선택이 되실 듯.. ^^ 제가 잠깐 소개드렸지만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꽤 있고 말이죠.

딸기 2006-11-06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학... 제가 무쟈게 약한 부분이로군요 ㅋㅋ
댓글저장
 
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부터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은 긍정보다는 부정의 뉘앙스를 품는 말이 되었다. 미국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이자 가장 부강한 자본주의 국가가 된 후, 미국의 그 주체하기 힘든 힘이 거들먹거림 또는 횡포로 변질되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였을 것이다. 나에게도 아메리칸 드림은 인간 욕망의 게걸스러우면서 추악한 극단에 대한 상징이다. 무한한 황금과 권력에 대한 꿈. 제러미 리프킨은 이런 아메리칸 드림의 부정적인 측면을 '죽음 본능'이라는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압축하여 보여준다.

"아메리칸 드림은 대부분 죽음 본능에 갇혀 있다. 미국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율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들은 과도하게 소비하며, 모든 욕구를 채우려 하고, 지구의 자원을 낭비한다. 미국인들은 무제한적 경제 성장을 중시하며, 강한 자에게 혜택을 주고, 약한 자에게 불리함을 준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전력투구하고, 자신이 원하고 또 원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일으켰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을 '선택받은 국민'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지구의 자원을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서글프게도 미국인들의 개인적인 이익 추구는 점차 순전한 이기심으로 변해 가고 있다. 미국이 어느덧 죽음의 문화가 된 것이다."

미국인인 지은이는 추악한 괴물이 된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할 새로운 인류의 꿈을 유러피언 드림이라 칭하며, 놀랍게도 이미 한물 간 땅이라 생각하기 쉬운 유럽을 그 꿈이 자라고 영그는 가나안 땅이 될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미주의 기술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한 책임급 엔지니어는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는 마치 돈키호테라도 보는 듯 시대를 착오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싼 돈주고 책을 읽고 있는 나역시, 초반부를 읽으며 이 책에 대해 마찬가지 느낌에 빠졌으니 오죽하랴.

그러나 60년대 피끓는 운동권이었던 지은이와 68혁명때의 신좌파의 꿈에 공감하고 그 꿈이 이뤄지기를 갈망하는 나에게, 신좌파적인 진보 의제가 가장 앞서 실천되어 가고 있는 땅인 유럽에 희망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 이유는 유럽이 EU 회원국 가입을 위해 "사형 제도 폐지를 필수 요건으로 내걸"고 있고, "돼지 사육 농민들에게 모든 돼지를 하루 20초씩 손으로 만져 주고, 서로 싸우지 않도록 두세 개의 장난감을 우리에 넣어 주도록 권장"하는 정부(독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EU가 "지구 환경에 대한 인류의 책임을 정치적 비전의 핵심으로 강조하는 최초의 정치 체제"인 동시에, "과학과 기술의 혁신, 그리고 시장, 사회, 환경에 신상품을 도입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규제 수단으로 '예방 원칙'을 사용한다는 법령을 채택"한 최초의 정치 체제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유럽 정치의 진보적 측면의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이 책은 이와 같이 유럽 정치의 진보성을 나타내는 무수한 예들로 가득하다. 나름 우리나라에서는 꽤 진보적인 생각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생소하게 여겨지는 개념들, 이를테면 보편적 인권 개념의 확장으로서의 '자연의 권리'처럼, 황당하게까지 느껴지는 개념들이 심심챦게 등장한다. 리프킨은 이렇듯 유럽 정치의 진보성을 풍부하게 예시하면서, 이것이 인류를 바람직한 미래로 이끄는 차세대 꿈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문제는 가능성이다. 2006년 현재의 세계를 둘러 보자. 미국은 '죽음 본능'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정권을 잡고 세계를 상대로 아메리칸 악몽의 유희를 벌이고 있다. 중국은 초기 자본주의화되어 가고 있으며, 일본은 최악의 극우 총리가 정권을 잡았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내전과 굶주림의 나락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며, 유럽마저 우익이 점차로 목소리를 높여 간다. 세계적인 우향우의 흐름을 힘겹게 홀로 되돌리고 있는 남미는 아쉽게도 힘이 별로 없으며, 너무 민족주의적이다. 진보의 꿈으로서의 유러피언 드림은 확산이 아니라 고사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래서 유러피언 '드림'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진보 세력은 언제나 지평선 너머를 응시했다. 어찌보면 꿈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응시가 있었기에 인류는 이 책에서 선보인 바와 같은 진보의 신천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리프킨은 예언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같지만, 그 희망이 지평선 너머의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그 희망어린 시선은 예언과도 같이 미래의 어느 순간에 꽂힐 것이다.

마지막으로 2006년 현재 우리나라를 둘러 보자. 우리는 지금 아메리칸 드림으로, '죽음 본능'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러피언 드림을 주장한다면 돈키호테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하늘을 나르고, 민주노동당의 존재감이 점점 작아지기만 하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우울하게도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색, 색을 먹자
윤동혁 지음 / 거름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옆집 아저씨같이 수더분하고 넉넉한 인상의 저자가 막걸리 한잔 나누며 두런두런 담소하듯이 채소와 과일에 숨어 있는 천연 색소의 효능을 써내려갔다. 알팔파, 파프리카, 브로콜리, 파슬리 등 요즘 들어서야 존재감이 드러나고 있는 서양 채소도 있지만, 감자, 호박, 깻잎, 우엉 등 구수한 된장 냄새 풍기는 우리네 채소들이 주인공이라 더욱 더 푸근하다. 하지만, 꼼꼼히 책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암 걸리지 않으려면 채소나 과일 위주로 먹어라.'고 은근스레 저자가 협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상 좋은 젊은이들 말만 믿고 공짜관광이라고 따라갔다가 어깨들 등쌀에 쓸 데 없는 약 한아름 사오시는 어리숙한 어르신이라도 된 느낌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식습관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 철없을 때에는 물보다도 더 많이 마시던 콜라였지만, 간혹 치킨에 따라오는 콜라가 몇 달씩 냉장고 안에서 썩어가기도 하고, 왜 먹는지 궁금하기만 하던 채소 샐러드나 겉저리가 이제는 나의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 되기도 했다. 이것은 입이 원하는 음식에서 몸이 원하는 음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몸이 원하는 음식에 스스로 가까워지자 입도 그것을 원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은 나의 이러한 식습관의 변화에 다채로운 색깔을 추가함으로써 '몸이 원하는 음식은 눈은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나의 고정관념을 박살내고 몸이 원하는 음식은 입도 원하고 눈도 원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매 쪽마다 삽입되어 있는 갖가지 색깔의 채소와 과일의 사진은 얼마나 식욕을 당기는지!

아쉬운 점이 조금 있다. 저자도 인정하듯이 암 예방에 너무 촛점을 맞추었다는 점. 책 제목에서 선명하고 강렬하게 다가왔던 주제의식이 채소나 과일의 백화점식 나열에 묻혀 색이 바랜 면이 있다는 점. 그러니까, 채소나 과일의 종류별로 설명하기 보다는, 특정 색소에 촛점을 맞춰 그 색소를 포함하는 식물과 그 효능에 대해 설명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우둔한 까닭도 있겠지만, 책을 다 읽고도 어떤 색소가 언급되었는지 전혀 정리가 되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다음부터는 이전보다 채소나 과일을 더욱 많이 먹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무척 고마운 책이다. 좀 오바를 하자면, 언젠가 '나를 살린 책들'에 이 책을 꼽는 날이 오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현재 김기덕 감독이 네이버 인물 검색순위 20위다. 그가 네이버 검색순위에 오르는 꿈을 실제로 꾸는지 모르겠지만, 평상시의 그라면 꿈도 꾸지 못할 순위다. 그가 영화 <괴물>, 그리고 한국 관객과 네티즌들을 상대로 했던 감정적 발언에 대한 감정적 사과 때문이다. 연합뉴스에 이메일을 보내며 사과했다는데, 자신의 영화는 '쓰레기'요, 자신은 '한국에서 살아가기 힘든 심각한 의식장애자'라고 했단다.

비록 내가 본 김기덕의 영화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어도, 나는 그의 영화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좋아한다. (내가 본 김기덕의 영화를 읊어 볼까나? <사마리아> - 사실 나는 이것이 김기덕의 영화인지, 이창동의 영화인지 지금도 헷갈린다. 그러나, 김기덕이 맞는 것같다. -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빈 집>, 그리고... 끝! 이런, 세 편 밖에 안된다. 그렇지만 나같은 사람이 한 감독의 영화를 세 편씩이나 본다는 것은 많이 본 것이 아닐까? -.-;;) 그의 영화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거칠게 표출되지만, 종교적 수행의 끈은 언제나 팽팽하게 잡아 당겨져 있다. 그의 영화는 고행의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고행은 구원에 대한 열망 또는 절망이 아웃사이더의 삶속에 녹아든 상태로 드러난다.

지난주 <100분 토론>에서 김기덕 감독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 공중파 방송의 격조높은 토론 프로그램에서 썬글라스를 끼고 말하고 있었다. 말하는 태도도 불량한 것이 억양도 어색하기도 하고 말 내용도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듯하고, 게다가 즉흥적이기까지... 아무튼 그의 토론 태도는 그의 영화의 분위기와 빼다 박은 듯이 닮았다. 이런 그이기 때문에 저토록 독특한 힘이 있는 영화가 나왔겠거니 생각했다.

이번 사과발언도 마찬가지다. 조울증을 방불케하는 감정의 기복, 자신을 괴롭히는 수행자의 자세,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은밀한 조롱을 퍼붓는 뻔뻔함까지... 그의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 중 많은 부분이 그의 사과발언에 녹아 있다.

나는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백남준을 떠올렸다. 시체냄새난다고 기겁을 하는 서양인들 앞에서 태연히 말린 오징어를 씹던, 세계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바지를 훌렁 벗어 버리던, 자신의 작품과 평소 행동이 일치했던 위대한 예술가를. 그런 기인을 나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들의 작품이 흥미로운, 그리고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들이 흥미롭고 논란스러운 이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김기덕이고 그의 영화인데, 무어 그리 대단한 꼬투리라도 잡은 듯 난리법석을 떠는지? 세상이 김기덕의 발언때문에 무척 시끄럽다. 심지어는 김기덕의 영화를 좋아했다던 이들도 강도높은 비난을 퍼부어댄다. "영화는 감독 혼자만의 예술이 아닌데도 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린 행태만 계속하고 있"단다. 김기덕이 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 그의 영화는 더 이상 볼 가치가 없을텐데?

내가 김기덕 감독에 대해 갖는 불만이라면 그런 것들이 아니고, 그가 앞으로 만들 영화를 한국에서는 못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불만이 위선이 되지 않으려면,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아직 보지 못한 그의 영화를 먼저 보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