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4/25에 수유+너머에서 있었던 박노자 선생의 강의 후기.
------------------------------------------------
지난 이틀간 레닌과 트로츠기의 관점으로 러시아 혁명과 현재를 보는 행운을 얻었다. 그것은 20세기가 시작될 즈음 가장 유명한 혁명가 두 명의 논리와 이상에 푹 담궈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결과는 의외로 충격적이어서 집으로 가는 내내 강남대로 주변의 딴딴한 빌딩들이 마치 과자로 지은 듯 위태하게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 딴딴한 강남 빌딩들이 왜 녹아내렸을까? 나의 저열한 인식체계는, 박노자 선생이 한국인 보다 더 유창한 한국어로 조성한 레닌-트로츠키 가상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사이버 세계에서 외부로 자연스레 방사되는 자본주의-무력화-광선이 빌딩을 용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나의 환상속에 레닌-트로츠키의 가상세계가 구축되었다. 박노자 선생의 굉장히 적확한 한국어 구사능력과 카스트라토의 하이톤을 연상시키면서도 사람을 깨어 있게 만드는 감칠스러운 음성에, 내 정신세계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와 같이 '나도 아니고 레닌-트로츠키도 아닌' 모호한 불확정성의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상세계는 임박한 자본주의의 종언과 그후에 따라 올 야만의 시대에 대한 묵시론적 예언이 있은 후, 현실세계와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강남대로의 빌딩이 봄볓아래 놓인 얼음조각처럼 녹아내렸음은 물론이고, 버스 옆좌석에서 휴대전화로 애인과 잡담하던 한 아가씨의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자본주의 종말의 징후를 나타내는 예언적 환청으로 변하여 귀에 꽃혔다.
그러나 자기 파멸적인 레닌-트로츠키 되기는 영속할 수 없었다. 그런 분열증적 환상의 0.5초 후에는 어김없이 편집증적 회의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레닌은 레닌이고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일 뿐이며, 그들 사상의 한계, 그리고 그로 인한 현실 사회주의의 소멸의 역사는 무기력한 편집증적 우울증이 20세기 초반에서 21세기 초반인 현재까지를 대표하는 좌파의 지배적인 정서라고 역설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정서를 극한까지 몰고 갈 스탈린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약 1초간의 좌파적 조울증을 겪고 난 후,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나는 안심했다. 내가 레닌에 대해, 트로츠키에 대해, 좌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도대체 무얼 알고 있던가? 진정 나의 앎이 미래에 대한 광적 열망이나 잿빛 자살로 이어질만큼 절대적인가? 내 손바닥위에 빨간약과 파란약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박노자 선생을 통해 확실히 확인하게 된 것 뿐. 다가올 진보적 미래에의 외삽을 위해서 필요한 많은 변수들 중에 어제 오늘 강의로 내 손에 얻게 된것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사진 몇 장일 뿐이다. 그 사진들의 힘이 로버트 카파의 '병사의 죽음'처럼 논쟁적이지만 엄청나게 강렬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스탈린-되기를 거친 후에는 나에게 어떤 환상이 찾아올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