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 / 학고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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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함에 대한 공감.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은 무심히 흘러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늙고 병들고 결국에는 죽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100년이 채 안되는 삶을 살면서 꽤나 많은 흔적들을 남기고 간다. 우리가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 중 중요한 두가지 양태가 일과 사랑이다. 둘 중 하나도 만만찮고, 쉽지 않은 법! 하물며,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 오죽 어려울까? 

그림 보여주는 민둥머리 손가락은 우울해(海)에 빠져있다. 자신이 평생 해나가야 할 일에 대한 불안과 고민 때문이다. 자신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 하나 뿐인 삶에 의미를 입혀나가는 방식(=노동)에 대해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찾아내서 그것에 몰입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큰 축복이자 행복이다. 물론 쉽게 풀리지 않는 모두의 숙제이기에 우울하고, 같은 숙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작가는 이러한 우울함의 공감을 세계의 명화들에게 찾아내는 일을 했다. 켜켜이 누적된 역사 속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 작품들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 절망과 체념 등은 인간과 인간, 시간과 시간, 시간과 인간을 엮어주는 멋진 매개물이다. 

눈동자도 없는 민둥손가락과 아귀 한마리는 이렇게 우울의 심연을 돌아다닌다.

절망, 좌절, 악몽, 추락, 절규, 상처, 죽음, 체념은 우울해에서 잡히는 어종들이다. 손가락의 우울은 기본적으로 꿈이 크기에 비롯된다. 우울증환자들은 우울할때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을 실행할 최소한의 의욕조차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고, 항상 위를 향하고 있다. 뭔가 높은 곳을 향한 지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좌절의 힘은 내부를 향하고 있다. (외부를 향해 있었다면, 손가락은 검지가 아닌 중지였을지도 모른다.)

손가락이 흔한 예상과 같이 밝은 곳으로 나오지 않고, 더 깊은 어둠속으로 침잠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어두움의 심연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사람들이 가지는 어두움의 감성들에 대해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 작품을 계속 만들어 감으로써 꿈을 이루는 것은 너무 잔인한 바램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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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평전 (양장) -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강주상 지음 / 럭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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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이 아까워서 네트워크를 끊고, 팬티가 썩도록 물리학에만 몰두한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소립자 물리학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석학의 반열에 오른 천재. 더 기대되는 날들을 앞에 두고 마흔을 갓 넘어 안타깝게 스러져간 인물의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했기에, '사물의 이치'를 연구했던 그에게 은근한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그가 이룬 업적이 과연 어떤 것인지는 감조차 잡지 못하겠다. 아마도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할텐데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이휘소라는 이름을 알고 있을까? 그것은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기도 한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대중성에 영합한 한 작가의 소설에 그가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책을 읽지 않았지만...)

'이휘소 평전'의 작가 강주상은 이휘소의 제자였다. 그는 같은 물리학자로서 이휘소가 이룩한 업적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목적 외에도, 박정희의 군부독재를 싫어해서 귀국조차 하지 않았던 이휘소의 생각과 행동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책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가지는 대중성의 힘은 참 은밀하고도 강력한 법이다. 이 책의 표지에는 "이휘소 평전"이라는 제목 외에도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출판사(혹은 저자)는 이휘소가 한국사람이었다는 민족주의적 감성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려 한다. 

이휘소는 그 자신의 주된 업적을 미국에서 세웠고, 그 업적의 토대가 되는 교육도 미국에서 배웠다. (물론 한국에서의 기초 교육이 있었지만, 그것은 교과서를 독학하는 수준이었고, 그의 천재성을 깨운 것도, 천재적 업적을 인정한 것도 미국이었다.) 다시 말해, 이휘소는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가 아니라, 다만 한국인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미국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고, 한국의 후학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기도 했지만, 그 모든 행동들은 국가나 민족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단지 물리학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사람도 미국사람도 아닌 물리국(物理國)의 국민이었을 뿐이다.

물리학자 이휘소의 천재성과 노력, 그가 알아낸 새로운 모든 지식들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그가 명석함과 집념으로 이루어낸 학문적 성취들과 같은 것이 후학들에 의해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도 성취되길 바란다. 그리고, 이런 학문적 성취들이 흔하디 흔한 경제적 성공과 비교해서 엇비슷하게라도 인정받을 수 있는 문화가 자라나기를 아울러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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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화하는 神의 나라 - 일본 지배세력의 정신세계
노 다니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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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곳은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중간 경유지인 일본 나리타 공항을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여행이란 행위가 일상의 당연한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낯선 것들을 경험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면, 이 책은 우경화 경향을 가진 일본의 정치가, 평론가, 학자들(마법사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가려하는 이야기이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말은 다수가 가진 공통의 관념이 갖는 힘을 말한다. 그리고, 민심은 리더들을 리더들은 민심을 상호 조형한다. 물론, 이러한 시간과 힘의 역동들은 일견 평온해 보이는 바닷속 조류처럼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마법사들은 종전이후 주눅들어 있는 일본인들의 패배주의와 원죄의식이 일본인들의 정신과 행동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이 그간 성취한 경제력에 버금가는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 혹은 리더로서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자각과 실천이 대의를 위한 것이면 좋겠는데, 이들의 방식은 지나치게 편협하거나, 과거의 군국주의로의 향수를 일으키는 것 같아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마찰을 빚는 주된 주제들(야스쿠니 신사참배, 교과서 문제, 독도 등 영토 문제, 일왕<일본인들의 천황> 중심의 특수한 세계관)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저자는 객관성을 위해 주로 자료의 정리와 나열로 이 책을 채워 나가고 있다. 반복적인 강조로 잡지와 신문, 저술, 정치활동 등이 어떤 방식으로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기고 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지만, 언뜻언뜻 비추는 감정적 대응과 협소한 레퍼런스에서의 중복인용, 일본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균형 잡힌 시각들을 전혀 소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일본의 관방장관이었던 아베 신조오는 이제 저자의 예상대로 일본의 수상이 되었고, 일본인들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알 듯하다. 히틀러는 모두가 생각하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웅변가라고 했던가?

일본인들은 그가 일본의 전후 세대 일본인들의 실질적인 대표자로서 무의식적 죄의식과 패배주의를 딛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을 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일본인이 영원히 패배의식과 원죄의식에 젖어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으로만 볼 때는 그들은 과거의 잘못을 부정하고, 일왕 중심의 국가적 우월주의나 선민의식으로 잘못을 되풀이하려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일본인들이 건전한 상식을 바탕으로 인류사회의 문화적 번영에 공헌하여, 과거의 정신적 도덕적 채무를 탕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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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윌리엄 슈니더윈드 지음, 박정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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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경에 관련된 책이긴 하되 종교서적은 아니고, 인문학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지식사회학 혹은 언어역사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보면 되겠다. 영원한 스테디 & 베스트 셀러인 성경은 문자와 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분석하는데 가장 좋은 텍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와 역자는 고대언어학자여서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면이 있다. 책의 전체적인 이야기 구성도 논리적이긴 하되, 흥미롭지는 않았다. 저자는 성경이라는 대상을 둘러싼 당시의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맥락들을 논거로 성경이 책이 된 시기와 그 의미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해내고 있다.

이 책의 독자로서 나의 관심사는 성경이나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에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지식이 구성되고, 기록되고, 전달되고, 해석되는데 있어서의 문화의 영향력이 더 관심을 끌었다. 저자가 이 책의 18~19페이지에서 제시하듯이 텍스트(text)보다 중요한 것은 컨텍스트(context)가 아니겠는가? 책을 읽는 내내 푸코가 말하는 "에피스테메"와 같은 지식과 문화의 지층을 바라보는 느낌을 가졌다.

성경은 누구인가에 의해 쓰여졌으며,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성경이 지니고 있는 남성적인 시각은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당하고, 이스라엘 역사라는 특수성은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성이라는 미덕을 위협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이 가진 권위는 사람들에게 좀처럼 비판적인 시각을 허락하지 않아 왔다. 이러한 이유로 아마도 기독교를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상당히 불경한 책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지 분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과연 성경이 누구에 의해 쓰여졌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궁금증을 갖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누구에 의해 쓰여졌는지 보다는 언제쓰여졌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주장은 당시의 문화적인 상황을 볼 때 타당해 보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문자와 책은 더 이상 희귀하지 않아서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숨쉬듯이 당연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너무나 차고 넘쳐서 쓰레기나 소음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성경(구약)이 쓰여지던 무렵의 상황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문자는 매우 희귀한 것이었고, 권력을 상징했다. 당시의 기록자는 단지 기록자의 역할을 했을 뿐, 자신의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라는 관념이 없었기에 누구에 의해서 쓰여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자는 앗시리아 제국의 출현에 의한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환경을 분석하고, 히스기야 왕에 이르러서 성경이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유사한 방식으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며 책으로서의 성경이 갖는 의미들을 전달하고 있다.

과거 중동지방의 역사에 대한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독자들은 저자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따라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분석방식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숨쉬듯 당연한 것들의 총체 = 문화"를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그들의 상황과 시각으로 연구하는 방식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보장해주는 듯한 탈맥락적 연구방식보다 더 객관적이고 보편성일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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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물리학
로버트 어데어 지음, 장석봉 옮김 / 한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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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구광이다. 어떤이들은 야구같이 지루한 경기가 없다며 혹평을 하기도 한다. 야구가 축구나 농구와 같이 하나의 명확한 Goal을 향해 쉴새없이 내닫고, 박진감 넘치는 운동량을 선보이는 경기들 보다 그 재미를 느끼기까지의 문턱이 비교적 높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축구나 농구가 그 원초성에 매력을 둔다면, 야구의 매력은 좀더 심오함에 있다고 하겠다. (물론 나는 그 단순함의 미덕과 역동성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축구광 농구광이기 조차 하다.)
 

야구는 모든 인기스포츠 중에 가장 상징과 의미에 기반한 문화적인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 끊임없는 긴장과 이완의 반복, 오랜 시간 정교화된 게임의 법칙들, 가용한 자원과 주어진 기회의 활용, 극적인 반전의 묘미... 심지어 오프시즌의 스토브리그까지 적어도 나에게는 야구의 매력은 끝이 없다고 할 정도다.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문화의 해석>에서 어떤 행위에는 여러개의 해석의 층위가 존재한다고 이야기 한다. 예를 들면, 눈을 깜빡이는 행위는 분자생물학의 미시적인 세포차원으로도 환원가능하지만, 먼지나 위협이 있을 경우에 행해지는 반사작용으로 묘사될수도 있고, 멋진 이성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호감의 행위로 하는 사회적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야구가 상당히 복잡한 룰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상징으로 가득찬 경기라고 할지라도, 108땀의 실밥으로 만들어진 가죽공이 18.44m밖의 포수의 미트로 들어가거나, 1kg이 안되는 타자의 방망이에 타격을 받아 담장을 넘어가거나 하는 극적인 요소들은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영화 속에서의 등장인물들이 초록색 기호들로 환원되고, 스타크래프트의 강력하고도 친근한 유닛들이 단지 숫자 조합으로 분석되듯이 말이다.

 

야구의 물리학이라는 로버트 어데어의 책은 야구 경기에서 일어나는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고, 받는 수많은 행위들을 물리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타를 친것이 아니고...) 이 책은 지나치게 물리학적 장광설로 치닫고 있는데다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처럼 부실한 날림번역 때문에 본래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지 못한 듯 보인다.

 

야구는 일상적인 수준의 모든 행위들과 같이 결코 탈맥락적인 행위들이 아니다. 야구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래프와 함수로 복잡하게 설명되는 물리학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9회말 투아웃부터 시작되는 약팀의 반격과 극적인 역전, 혹은 스타플레이어의 습관이나 서로 얽힌 관계들을 즐기는 것이다. 마이크 피아자와 로저 클레멘스의 날카로운 신경전, 릭 엔키엘의 어이없는 폭투, 매니 라미레즈의 시원한 홈런을 공의 회전과 관련된 유체역학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구광들에게 이 책이 많은 재미를 주려고 했다면, 네번을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물리학 방정식보다는 한 층위 현실과 관련된 내용으로 가볍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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