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 시공 로고스 총서 5 시공 로고스 총서 5
J. G. 메르키오르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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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어깨에 걸터앉아 뒤통수를 보는 재미

미셸 푸코(1926-1984)
그의 저작은 하나의 숲과 같다. 그것도 단정하고 곧게 뻗은 침엽수림이라기 보다는 온갖 넝쿨손이 엇갈리고, 발밑은 푹푹 꺼지는 정글과 같은 숲이다. 언젠가 그의 초기 저작인 ‘광기의 역사’를 손에 들고, 읽은 줄 또 읽어가며 거의 광인(狂人)이 될 뻔 했었던 경험이 있다. 아마도 그가 사유하는 방식이 매우 낯선데다, 다소 지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런 정글에 무턱대고 들어갔을 때는 몇 발 못가서 지쳐버리기 마련이다.

몇 년이 지나고, 이 정글의 지형을 알려주는 지도를 만나게 되었다. ‘푸코’라는 제목의 입문서가 바로 그것인데, 메르키오르(저자)는 푸코의 모든 저작들을 섭렵하고나서 나름대로 친절한 입문서를 남겼다. 이제 새로운 방식의 정글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마치 거인의 어깨에 걸터앉은 채, 잔잔한 웃음까지 지으며 ‘푸코’라는 숲을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이는 입문서나 해설서에 관한 편견이 다소 사라지는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원전을 중요시 하며 입문서의 가치를 평가 절하한다. 그러나 지식이란 자신에게 의미있을 때만 진정한 것이다. 혹자는 타인의 해석을 따라가는 것이 ‘독창적 책읽기’에 크게 방해가 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정보 범람 시대에는 독창성 못지않게 효율성의 문제가 중요하다. 게다가 훌륭한 입문서는 원저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든다. )

거인의 어깨에 앉아서 시야를 확보한 후, 숲을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보였다. 

먼저 철학과 역사를 결합하려 한 푸코의 사유방식이 보였다. 생활이 모인 역사가 갖는 불완전함은 추상이 주는 철학의 완전함을 상대화 시킨다. 그는 이렇게 세상을 조감함으로 새로운 지식에 도달한다.(그는 부인하지만 그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에게는 구조주의자라는 호칭이 따라다닌다.)

다음에 보인 것은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관념이다. 그는 앞서 말한 사유방식으로 ‘지식의 역사적 지층’을 찾아냈다. 한 시대와 문화의 일반화된 해석체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단절적이고, 이 지층간에는 긴장과 갈등이 있지만,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

이제 점점 그의 사유는 친숙해져서 일상과 결부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의 판옵티콘(panopticon)은 왜 이리도 거칠고 어설픈지(비록 좋지 않은 의미에서 세련되고는 있지만…), 감시탑의 주인과 그의 행동이 훤히 보인다.

드디어 시선은 추상과 세계와 우리 사회를 거쳐 나의 뒤통수에 날아와 박힌다. 근대 서구의 자아의 조작된 인간관인 ‘온순한 인간(Homo Docilis)’의 개념이 내 속에서 숨쉬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살펴보고 나는 거인의 어깨에서 만족한 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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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의식 - 현대심리철학입문
P.M.처치랜드 지음, 석봉래 옮김 / 서광사 / 199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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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질과 의식이라는 책을 "유물론의 향기로운 전도서"라고 부르고 싶다. 저자는 매우 친절하고 세심하게, 때로는 강력한 논지로 유물론이란 종교를 전파하고 있다.  전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매우 미숙하다.  열정이 논리를 압도하여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몇몇 향기로운 전도자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주도 면밀함과 솔직한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다만, 지적할 것은 부분적인 객관성과 전체적인 편향이다. 부분적으로 보면 주장과 반론의 객관적 검토가 뛰어나지만 전체적인 구성과 어투는 유물론을 옹호하고 있다. 난 이 책을 부분적 주장과 반론의 언급보다 전체적인 시각에서 되돌아 보고자 한다.
 

  존재론은 모든 철학의 근간이 되는 영역이다.  그런데 존재론은 논의에 비해 결실이 적고, 현대 사회의 병리현상이나 큰 전쟁등이 부른 절실함으로 인해 현대철학은 인식론이나 가치론의 영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과학'이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며 그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과학철학은 존재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주된 관점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이제 이 새로운 관점으로 존재론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등으로 영역을 구분하는 태도는 그것들의 상호 연관성으로 볼 때 그다지 바람직 스럽지 않다.  현대는 멀티미디어와 탈 장르의 시대가 아니던가? 이런 구분들은 워낙 거대한 철학적 논의를 편의에 의해 분할한데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존재론을 꼼꼼히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론의 언급에서 작가의 편향이 숨어있다.  작가는 존재론에서 이원론과 유물론만 다루고 전통적으로 존재론의 한 영역인 관념론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관념론에 대한 것은 5장의 방법론에서만 잠시 언급한다.) 물질을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관점을 존재론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가진 당연한 상식인 듯 보인다.

 

 의미론은 분석철학의 영역이다. 이는 언어의 뜻을 정확히 정의하고 분석하므로써 연구대상의 본질을 밝혀내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처음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로 인간을 이해하려한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졌으나 이 책에서 존재론과 의미론의 밀접한 관계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언어를 정의 하는 방법은 크게 내적 현시와 이론적 망상구조에 의한 정의로 대별된다. 내적현시에 의한 정의 방식은 인간이 느끼는 내성에 의해 언어를 정의 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존재론상의 이원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내성은 자기 외에는 어느 누구도 대신 경험할 수 없는 방식이므로 내적 현시에 의한 언어의 정의는 어떤 형식으로도 서로 같음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회의론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회의론에도 불과하고 이원론자들이 이 방식을 인정하는 이유는 내성이라는 정신적 경험이야 말로 영혼을 존재하게 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론적 망상구조에 의한 언어의 정의 방식은 유물론자들이 채택하는 방식이다. 이는 어떤 언어의 정의는 그 언어의 본질적 속성이 관찰가능한 다른 속성과의 인과관계속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내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배제할 수 있는 정의 방식이기에 유물론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유물론은 여러가지 면에서 인간이란 존재를 격하시키는 측면이 있다. 환원적 신경과학은 인간의 창조적 활동은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진화론은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 내린다. 하지만 인식론의 영역은 유물론의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인간의 자리매김을 달리 하는 측면을 가진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인식론의 영역을 '다른 존재의 마음의 문제'와 '자기 의식의 문제'로 축소하여 다루고 있다. 많은 인식론의 영역을  존재론과 장법론의 견지에서 다루고 있는 듯하다. 심리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르로 근본적으로 인식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며 이 책의 영역인 심리철학도 많은 부분 인식론의 측면에서 다루어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존재론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느낌을 간단히 적으려 한다.


  인간은 최근에 들어와서 자기의 가치를 놀라울 정도의 큰 목소리로 부르짖곤 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무한성을 떠올릴 때는 처음의 큰 목소리 만큼이나 자신의 왜소함과 무가치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시간과 공간의 틀은 존재론, 특히 유물론의 기본틀이란 점에서 인간은 존재론의 영역에서는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두 축에서 하나의 작은 점으로 표시될 수 있다. 점은 넓이도 부피도 갖지 못한채 위치만을 표시하는 속성으로 볼때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인간은 이런 절망과 한계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인간은 이러한 생각을 계속하다가 생각을 하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으로 존재들을 바라보는 인식의 주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존재론의 거대한 두 축에 또 하나의 축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인식론의 시작이 아닐까?  인식론의 시작으로 인간은 공간과 시간에 매몰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한 인간은 점에서 넓이와 부피를 갖는 존재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방법론의 논의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현상학의 영역이다.  현상학은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생활과 그에 따른 사적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의 기억들이 대뇌 피질부의 조그마한 주름으로 환원될 지라도 개인들의 경험세계의 존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개인의 세계를 연구함으로써 보편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이 그럴 듯 하다고 느껴진다. 어차피 모든 연구는 개인의 경험의 일부이며 그 연구의 방향성은 사적 경험의 세계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다. 보편적인 세계를 직접 연구하는 것이 이렇게 개인의 주관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방향을 바꾸어 사적 경험의 세계를 연구해서 보편적인 세계를 추론하는 방식이 바로 현상학이다. 방법론의 나머지 영역인 인지/연산적 접근법과 방법론적 유물론은 인공지능과 신경과학의 장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두가지, 즉 컴퓨터 과학과 생명과학은 유물론의 발전과 이상 실현의 가장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공 지능이란 가능한 것인가? 컴퓨터는 최근 인간이 만든 것중 가장 그럴듯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을 연구하기도 하고, 자신이 만든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인간의 정신을 유추해서 컴퓨터를 만들고는 컴퓨터를 유추하여 정신을 살피고 이제 그것을 만들어 내려 하는 것이다.  수 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들의 반란을 다루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공지능에 대해 회의적이다. 고등 동물의 의사 결정과정은 노링와 연산의 과정 보다는 감성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생리심리학은 그동안 궁금하던 인간의 행동을 상식에 맞는 새로운 관점에서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이제는 생물의 오묘한 신비가 생물학의 영역으로 환원되고 이제 미지의 세계로 남은 것은 뇌를 비롯한 신경계 뿐인듯 하다. 이제 신경과학이란 말이 곧 생물학을 뜻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신경과학에서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기쁨, 우울과 같은 감성적 영역들을 신경 전달 물질등을 통한 과학적 증명과정이다. 앞으로 신경과학이 발달을 거듭한다면 인간의 감성의 영역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면 한편으로는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태까지 물질과 의식을 읽고 느낀 점을 정말 두서 없이 적어 보았다. 시간에 쫓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넘어가거나 좀더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 꼭 다시한번 읽고 많은 생각을 해 보아야 겠다. 이책은 존재론, 의미론, 인식론, 방법론 등의 철학적 발전 과정과 각 주장들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보다는 한 주장에 대한 빈틈없는 근거제시와 반론들을 통해 다각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갖게 해 준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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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과 현 실 과 금 지 와 저 항 과…….

허기(虛飢)나 몰아내려 아무렇게나 비빈 점심 밥그릇에 콩이 설걱인다. 유달리 매끈거리는 한 개의 콩을 집어내다 실패하기를 서너차례….. 얼굴까지 벌개지며 기어코 문제의 콩을 집어낸다. 젓가락 사이의 콩을 바라보니 입가에는 피식 웃음이 배어 나왔다.
이렇게 문득 스틸 사진과 같은 삶의 단면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때면, ‘현실’이란 두 글자가 실체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 ‘현실’ 뒤에는 그림자처럼 늘어붙은 ‘꿈’이 숨쉬고 있다. 현실과 꿈은 이렇게 단짝 마냥 언제나 붙어 다니다가 일상(日常) 속에 환상(幻想)적으로 문득문득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 현실과 꿈은 서로 뗄 수 없는 단짝이다. 꿈과 현실은 서로 다르지 않은 이형동체(異形同體)의 존재인 것이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도 있지만, 극과 극을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다른 것으로 확대해석하면 안된다. 양극단이라는 것은 동일한 컨티넘(continuum)을 가정한 말이기 때문이다. 본래 극과 극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정말 다른 것은….. 음….. 예를 들자면….. 음…….
지쳐서 더 이상 뛰지 못하는 어린 누(gnu)와 조밀하게 지어진 아파트에서 사생활을 보호하는 버티컬 블라인드(vertical blind). 이런 것들이 정말 다른 것일게다.

에로스와 문명 – Marcuse ; 꿈과 현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는 꿈이고, 아폴론은 현실이다.
프로이트에게 이드(id)는 꿈이고, 에고(ego)는 현실이다.
마르쿠제에게 에로스(eros)는 꿈이고, 문명(civilization)은 현실이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사람들을 명료하게 해준다. 그래서 때로는 이분법이 갖는 엉성함과 전체주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둘로 구분하기’는 유용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둘이 아니라던 꿈과 현실을 거친 기준으로 이간질 시켜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꿈은 폭발적인 생산성의 원천이고, 근원적 에너지다. 이것은 자유롭기가 기체와 같아서 잡으려해도 좀처럼 잡을 수 없고,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장난스레 유랑한다. 굳이 나누자면, 철학과 문학, 신화와 문화가 꿈의 영역이다. 본질적으로 자유로워야 하는 속성을 지닌 것들.
현실은 딱딱한 속성을 지닌다. 정적이고, 정제되어 있으며, 세밀한 짜임새를 자랑한다. 내맘같지 않게 엄격하기도 하고, 일의 성격이 강하다. 법과 도덕, 정치와 경제가 현실의 영역이다. 본질적으로 위험한 것을 금지하고 안정을 원하는 속성을 지닌 것들.
어느 영역이 좋고, 어느 영역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꿈은 현실을 만드는 원동력이고, 현실은 새로운 꿈의 자료를 제공한다. 이 두가지는 적절한 긴장과 균형 속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꿈을 억압하는 것에서 현실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네오-프로이디안이라고 할만하다. 기본적인 억압은 고삐 풀린 말의 힘을 유용한 노동력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한다. 날아다니기만 하는 것을 모아 결정(結晶)을 이루는 것이다.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대한 문화적 변용. 이것이 바로 문명의 발생이다. 이것이 계통발생이다. 그리고 개체발생은 이미 프로이트가 이야기 했다. id에 대한 억압이 만들어낸, 현실원칙을 따르는 ego . 다르지 않다.

문화가 갖는 금기적인 속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그러나 마르쿠제가 말하는 억압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최소한의 억압을 ‘기본억압’ 이라 불렀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억압의 강도가 지나치다. 그것은 딱딱해 지기 쉬운 속성을 지닌 현실에 대한 자살 행위다. 지나치게 딱딱한 것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현실은 너무 딱딱한 것 같다.

공산당 선언 – Marx & Engels ; 꿈꾸는 것은 금지된다.

1848년 1월. 30세와 28세의 두 젊은이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의 결과가 ‘공산당 선언’이다. 이들의 꿈은 그 후 펼쳐질 현실에 막대한 동력을 제공했다. 그들의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으며, 백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들의 꿈은 여전히 중요한 듯 보인다.

1994년 20세의 젊은이가 그들의 꿈을 4500원에 엿보려 했을 때, 서점 직원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것은 금서(禁書)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또 다른 대형서점에서 20세 젊은이는 아무런 제지없이 ‘공산당 선언’을 구입할 수 있었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과잉이라기 힘든 과잉억압이다.
꿈은 본질적으로 현실의 지배자들에게는 위험한 일이다. 공고한 그들의 업적을 부정할 지도 모를 그런 자유로운 것. 하라는 영어공부나 열심히 하고, 군말 없이 현실세계의 듬직한 일꾼이 되어주면 참 좋겠는데,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꿈이라니…. 영 마땅치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주요 경계 대상은 야한 꿈이다. 단지 꿈인데 그것이 그렇게 위험할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어쨌든 장정일과 마광수 등 꿈꾸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꿈으로 인해 사법처리까지 받아야 했다. 현실의 가치로 꿈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실의 입장에서 보면 생산성 없고, 미숙해 보이는 Wet dream(夢精)일지라도….. 현실의 속성이 안정과 생존이듯 꿈의 속성이 자유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조금 과하다 싶어도 말이다.

형성된 현실이 자기 방어를 위한 노력을 이해한다. 그리고 나쁘지 않다. 문명은 본래 이런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이다. 지금 꿈은 현실에 비해서 터무니 없이 평가 절하되고 있고,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권력과 지성인 – Said ; 금지된 것을 꿈꾼다.

사이드에게 지성인은 꿈꾸는 사람들이고, 권력은 현실이다.
지성인은 좀더 독창적이고 세련된 꿈을 꾸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이드는 이런 사람들에게 권력의 금지와 회유에도 꿋꿋하게 꿈꿀 것을 촉구한다. 꿈꾸는 자의 역할은 현실에 활력을 주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독특한 꿈을 생산해 내는 것이지 현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많은 지성인들은 현실을 위해 권력에 흡수 고용되어 현실을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구애됨은 꿈의 본질을 망각한 것으로 이것들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꿈은 근본적으로 기존의 것에 대한 의심, 빈정거림, 저항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바타이유가 “철학은 철학을 부정할 때, 또는 철학에 조소를 보낼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고 <에로티즘>에서 말했던 것 처럼……
꿈은 끊임없이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꿈은 언제나 자기 파멸적이다. 꿈은 늘 새로워야 하고, 저항적이어야 한다.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심한 억압으로부터 꿈의 가치를 되돌리기 위해서, 이간질된 꿈과 현실을 다시 화해시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꿈과 현실은 둘이 아니다. 꿈이 위축되면 곧바로 현실은 저열해지고 만다. 활기없고, 딱딱해서 썩어가는 환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을 위해 꿈을 꾸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기능을 한다. 꿈과 현실은 둘이 아니기에 그 가치는 동등하다.

꿈꾸는 망아지들이 고삐를 풀고 자유롭게 더욱 자유롭게 뛰어다니다가 행복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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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와 문명, 마르쿠제, 김인환 역 ;
프로이트 이론을 철학적, 사회적으로 연구한 책. 프로이트를 20여년 꾸준히 읽으셨다는 김인환 선생의 번역이 매우 훌륭하여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 엥겔스 ;
마르크스의 저작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읽혀진 고전으로 길지않은 분량과 친절한 해석, 원문이 같이 들어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 권력과 지성인, 에드워드 사이드 ;
에드워드 사이드가 1993년 영구 BBC의 리스 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지성인의 구속되지 않는 역할과 태도를 강조한 이책은 올바른 지성인의 표상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2003년에 돌아가신 이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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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10-03-15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서재브리핑 눌렀을 때 깜짝 놀랐다는 거
땡스투를 향한 욕망? ㅋㅋ
네이버에서 미처 못본 글도 많네요
다시 시간내서 읽으러 와야겠어요
특히 왠지 이 글 탐나는... 뭐랄까 이 밤에 강의 듣고 가는 기분 ㅎㅎ

동녘새벽 2010-03-15 08:50   좋아요 0 | URL
네이버에 있는 글이예요. 모두. 꼭 땡스투 아니더라도 카테고리 하나는 알라딘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영 진도가 안나가네요. ㅋ
 
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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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족의 담담한 세상보기

 약간 우울한(mild depressive) 사람이 세상을 가장 정확하게 본다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가 있다. 이 결과는 논문 속의 복잡한 수치와 분석 기법 보다는 오히려 은희경의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에 더욱 잘 구현되어 있었다.

 우울이라는 감정도 약물로 조절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우울하려면 일단 외로워야 한다. 그리고, 외로우려면 자신의 존재를 돌아볼 줄 아는 조건들이 절실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모두 그렇다. 경제적 문제가 크지 않은 30대의 지성을 갖춘 여성 혹은 남성들. 인생의 절반쯤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삶의 문제들은 죽음처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의미 ; ‘사랑’에서 쿤데라가 한 표현) 다가온다. 벗어나기 힘든 일상들과 환상들 속에서 타고난 외로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외로움의 족속들은 담담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일상이라는 것 만큼 복잡한 양가감정을 지닌 단어가 또 있을까? 일상의 지겨움과 일탈의 두려움. 어떤 하나를 택하기에 다른 한가지의 기회비용이 너무나 커보이는 그런…. 그래서 사람들은 환상을 택하기도 한다. 일상을 살며 일탈이라 느끼는 환상. 사람들은 일상의 지겨움을 넘어서기 위해서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끊임없이 증폭시켜 살아간다. 이런 환상의 주된 주제는 바로 사랑과 고통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소설의 주인공 만이 누릴 수 있는 일상을 벗어난 삶을 살아 감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고통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절대 환성 속으로 밀어넣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외롭게, 한 점의 과장도 없이, 담담하게 자신과 직면하고 있었다.
삶은 어차피 억지스런 의미 부여와 과장 또는 증폭과 상관없이 내 것인 듯, 내 것이 아닌 듯, 그렇게 나비 마냥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것임을 아는 듯이 모르는 듯이…..

 이 담담한 태도는 나의 감성에 들어 맞는다. 더구나 작가는 뛰어난 관찰과 표현으로 일상속에서 비일상성을 끄집어 내고, 일탈 속에서 일상성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가을을 닮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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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자 무소작 씨의 종생기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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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씨앗을 뿌리는 인문주의자 무소작의 여행기

`지지직~` 갈라진 마당 틈새에서 기어나오는 개미를 초점을 잘 맞춘 돋보기로 오그라뜨리는 장난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왜 그렇게도 신나고 재미있었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어린 시절 다소 잔인한 장난이 내 머리속에 다시 떠오른 것은 이청준의 신작소설 "인문주의자 무소작 씨의 종생기"를 접하고 나서다.

어린 무소작 처럼 집안에 혼자 남겨진 나는 은빛 테두리에 손잡이가 검은 돋보기를 들고 개미사냥에 나섰다. 아직 어려서 정밀하지 못한 손으로 어렵사리 햇빛을 모아 신나게 개미를 오그리고 있었는데, 난 문득 놀라운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프리즘을 통해 비친 `무지개`였다. 난 곧 개미사냥을 잊고 `무지개`에 매료되었다. 강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빛이 어울려 내는 아름다움을 뿌리는 그 빛에 매혹된 채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다소 엉뚱했던 어린 무소작은 소풍길 큰 산에 올라가서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를 어렴풋이 느끼곤 떠나게 된다. 읍에서 서울로, 서울서 세상으로.... 그도 `강함`보다는 `아름다움`에, `같은 것`보다는 `다양한 것`에 매료된 것은 아닐까? 떠돌이가 된 소작이 다른 것을 찾고 그것이 익숙해 지면, 또 다시 다른 것을 찾아 헤매이는 것은 마치 무지개를 찾아 나선 사람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떠돌이 무소작도 세월을 비켜 갈 수는 없었고, 마침내 더 이상 직접경험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경험을 퍼뜨리는 이야기꾼이 된다.

사라져 버린 고향에서 소작은 좁은 하늘아래 사는 고향사람들의 일상에 `다름`을 더해주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점점 무소작의 이야기가 익숙해 지고 만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다름`을 통해 `다름`과 `같음`이 맞닿아있고, `보편`과 `특수`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득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야기 꾼 소작도 `밖의 경험`에 비해 형편없는 `안의 경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의 유일한 안의 경험인 꽃씨 뿌리는 할머니 이야기를 비롯한 이야기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게 된다.

`강함`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같음`에 `다름`을 더해주는 사람이야 말로 인문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강함`과 `같음`이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 아닌가?

이 책을 덮을 즈음 늙은 이야기꾼 무소작씨는 그렇게 세상에 무지개의 씨앗을 심으며 세상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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