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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 하나님께로 가는 거침없는 믿음의 길
브레넌 매닝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나는 수학을 좋아했다. 수학에는 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정답이 있다. 수학 문제의 답과 같이 나는 세상 일에 있어서도 정답을 원했다. 어느 대학을 갈 건지, 어떤 직장을 가질 것인지,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에서부터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 것인지, 택시를 탈 것인지 버스를 탈 것인지, 몇 시에 집에 돌아갈 것이며 언제 잘 것인지 등 하루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나는 정답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정답 여부를 알 수 없이 단지 선택을 할 뿐이었다. 때때로, 선택이라는 자유로부터 도망갈 수 있기를 바랬다. 왜냐면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히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면서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 안에는 내 선택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만과 불안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정답을 알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성과 판단력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모든 발생 가능한 일을 예측하지 못한다. 내 결정의 영향력을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선택권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이라면 정답을 아실 것이다. 나는 기도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일에서 나의 많은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나에게 결재를 내려주시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어떤 것이 올바른 결정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내 스스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벼랑 끝까지 몰려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나온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했다. 분명히 그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기도의 열을 올렸다. 나는 철저하게 나의 최선을 다해 기도했다. 하지만, 나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나는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주춤거리게 되었다. 누구는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데 나는 나의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기도에도 응답의 조짐조차 받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오랜 시간 많은 부분을 생각했고 하나님과 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와중에 내 인생은 여전히 부족한 나의 결재를 받으며 내가 원하는 멋진 모습과는 많은 거리를 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이 책, 브래넌 매닝의 '신뢰'를 읽으며 나는 또 다시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내 삶이 불완전한 이유, 나의 모습이 내가 상상하는 모습과 다른 이유, 좌절된 기도의 이유,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 고통과 아픔의 이유 등에 대해 수긍할 만한 대답을 얻고 싶었다.
처음에는 나는 신나서 책을 읽었다. 내가 이제껏 찾았던 이유들과 흡사한 대답들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 그 흐름은 끊기기 시작했다. 내 상식과 이해를 넘어선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책의 흐름을 좀 더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논리의 흐름과 매닝이 내 머릿속에 그려놓는 수많은 이미지들로 인해서 놀랐고, 즐거웠고, 마음 깊이 감동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책을 훑어보고 난 후 나는 그의 통찰력과 지혜 앞에서 잠잠히 서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내가 조각조각 알고 있던 대답들이 하나의 흐름 속에 이어졌다. 나는 매닝에게 별로 뒤지지 않는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책을 거듭 읽을수록 나의 대답의 깊이 없음과 단편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의문이 대상이었던 고통의 문제, 한동안 나의 기도제목이었던 '가봇(주님의 영광)'의 가치, 예술적 작품과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대한 존재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 기도 응답의 하나님의 주체성, 겸손의 방법,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민감함, 가차없는 신뢰를 가능하게 하는 법 등이 개별적인 진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커다란 진리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더불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뢰의 중력장’ 안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삶의 난제들이 해결 궤도를 찾아 질서있게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작은 책 한 권에 수많은 문제를 다 풀어 넣었을까? 까불거리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나는 'Ruthless Trust'라는 말을 기억하려고 한다. 나는 처음에 이 제목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Ruthless'라는 단어는 로마서 1장에 나온 타락한 사람들의 최악 정점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신뢰(Trust)는 기독교 최고의 가치임에 분명한다. '연민없는 신뢰' 이 말 자체가 모순적인 말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 의문점이 풀리는데 연민없는 신뢰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의미한다. 그 두 단어의 조합은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나의 끊임없는 자기 연민에서 나온 것임을 그리고 나의 시선이 내 안에 머무르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고통과 보잘것없는 현재 모습에 대한 자기 연민, 좌절된 기도에 대한 자기 연민, 성장기를 지나 점차로 나이 들어 가는 나의 모습에 대한 연민, 경제적 능력의 부족함에 대한 자기 연민, 그 모든 나에 대한 연민의 시선은 신뢰의 장애물이었다.
나 자신의 연민으로 인한 내부 시선의 시간을 제한하고 하나님을 향한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결정적 단어가 바로 이 단어 'Ruthless Trust'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앞에서, 처절한 실패와 좌절 앞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앞에서, 나는 내게 이 단어로 말을 걸 것이다. 그리고, 떨리지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싱가폴에 선교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싱가폴 대학에서 한 학생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가 내게 "당신은 Brainwash 당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 뜻을 물었다. 그러니까 그 학생이 두뇌를 어떤 특정 지식으로 자꾸 씻어 내려서 그 지식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단지 그 지식을 믿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제서야 그 말이 '세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7년 정도 지난 일인데 나는 아직도 그 단어 'Brainwash'가 가끔 생각난다. 세상의 가치관과 제한적인 지식, 손상된 의로움으로 나는 물들어 가고 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우주의 CEO다. 선과 악은 내가 판단하고 응징한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모든 것은 내 통제 안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거침없이 살아가다가 때때로 내게 'Brainwash'가 필요함을 느낀다. 나 자신을 복잡하게 만드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가치관, 모든 신비의 가능성을 말살시켜버리는 유물론적 세계관,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하는 자본주의 사상에서 내 삶을 단순하고 겸손하며 깨끗하게 해 줄 정신적인 청결화 작업이 필요함을 느낀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분명 'Brainwash'의 경험을 했다. 편견과 선입관, 잘못된 인식과 오해의 많은 부분을 씻겨내고 단편적 이해와 깨달음의 조각들을 유기적으로 통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청결화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안다. 살면서 죽을 때까지 사는 방법을 배우고, 삶의 문제에 대한 정답들을 하나씩 찾아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종종 '브래넌 매닝'의 '신뢰'와 같은 책을 다시금 만나는 행운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