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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존 R. 스토트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쓰여지도록 동기를 부여한 사람은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의 하나인 버트란드 러셀이다. 그의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20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지성인 중 한 사람인 존 스토트에게 충분한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존 스토트의 명성을 알고 있었고 그의 저서에 친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이 나왔을 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존 스토트가 러셀의 철학과 논리에 도전장을 내밀고 반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책에 그런 의도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철저히 논증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감동적이거나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철저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체험과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이다. 만약에 기독교를 옹호하거나 강요하는 책이라면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하는가?' 또는 '왜 기독교가 진리인가?' 정도의 제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신비와 논리와 감정이 결합되어 있다. 한쪽으로 치우쳐있지 않고 균형을 잡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혹은 세상이라는 곳이 바로 그런 것 같다. 늘 설명할 수 없는 신비만으로 가득하지는 않지만 분명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 가장 멀다고 어느 책에 쓰여있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성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이성적으로 절대 할 수 없는 것도 감정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분명 감정은 철저히 배제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사실, 어떤 이는 이 책이 C.S. 루이스나 프란시스 쉐퍼가 쓴 변증적이고 논리적인 글과 다르다고 해서 배척할 지도 모르겠다. 또는 그다지 감동적인 이야기가 없다는 이유로 밀어내 버릴 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별 흥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책의 가치이다. 논리만으로도 감정만으로도 신비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고 인간이다. 어떤 한 가지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은 복합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이 책의 시작은 신비이다. '천국의 사냥개'라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소제목으로 시작한다. 웬 뜬금없는 개이야기? 천국의 사냥개라는 표현은 존 스토트가 프란시스 톰슨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천국의 사냥개는 하나님을 비유한 말이다. 사실 이 부분만으로 이 책은 끝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천국의 사냥개로 인해서 존 스토트는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책의 뒷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인간, 자유에 대한 질문과 진지한 대답이 기술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인의 시각으로서 가능한 판단과 대답이지만 저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최선의 결과는 바로 천국의 사냥개 덕분에 가능했다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독자들이 1장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 이후는 편견이고 오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의 사냥개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사람과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과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굳이 그것을 배제할 이유는 없다. 별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성능 좋은 망원경이 발명되면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이 별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생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렌즈가 있다면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것이 좋은 렌즈임을 충분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볼 것 같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이 질문 말이다. 이 책이 그 대답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대답은 아마 개인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정해진 답은 없다. 천국의 사냥개. 나는 이 존재의 끈질기고 포기하지 않는 추적보다도 이 존재가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천국의 사냥개가 추적하고 있는 것은 정말 한심한 무리이다. 쫓고 있는 천국의 사냥개에게 끊임없이 돌을 던지고 덫을 놓는 무리들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약간은 덜 떨어진 무리들, 무식하고 이기적인 무리들이다. 이 무리들을 위해서 천국의 사냥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면서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교회는 덜 떨어진 짓들을 자행한다. 그리고, 물론 그 안에 어린 아이같이 우와좌왕하는 내가 있다. 나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내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심한 떨림이 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절망감으로 인해 스스로를 폐기해버리고자 하는 나의 쓸쓸한 마음을 온 몸으로 감싸안은 그의 상처 때문이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이다.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부족하고 때로는 악한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나 또한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부족함을 인하여 나를 버리는 분이라면 나는 그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완벽한 사람만 골랐다면 나는 결코 그 무리안에 끼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는 미완성 공동체라는 것. 나는 그것으로 인해 희망을 갖고 용기를 얻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미완성 작품이지만 아무도 그 작품이 가치없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미완성 작품이다. 나도 그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 부족함을 느끼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또 다른 이유를 이 책에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러셀의 책을 읽었다. 내가 러셀의 책을 읽은 이유는 기독교를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을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아마, 러셀의 책은 기독교를 거부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해줄 것이다. 물론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할 말이 좀 있었지만... 내가 러셀의 책을 읽은 것처럼 많은 비기독교인들도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물론, 할 말도 많고 이해안되는 부분도 인정하기 싫은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 책을 읽는 비기독교인 중 몇몇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뒤쫓고 있는 '천국의 사냥개'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