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울다
제럴드 L. 싯처 지음, 이현우 옮김 / 좋은씨앗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진화론도 창조론도 모두의 동의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과학적이라는 진화론은 수많은 또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배척을 당하기도 하고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또한, 창조론이라고 하는 것은 증명 자체가 어렵다. 창조론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가 ‘끝’이다. 진화론처럼 어떤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진화론을 반대할 근거는 제시할 수 있지만, 창조론은 주장의 근거가 없다. 창조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창조론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근원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을 존재케 한 신을 경배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즉, 인간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을 만든 신 자체에 우리의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 될 것이다.

창조와 진화처럼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에 또 하나가 ‘고통’의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서 울다’는 이러한 고통의 문제, 상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저자 스스로가 끔찍한 상실을 경험했기에 상실의 고통에 대한 그의 깊이있는 성찰이 책 전반에 쓰여져 있다. 고통과 상실은 원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담배를 많이 핀 사람이 폐암에 걸리는 경우처럼) 뚜렷한 원인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저자의 경우에도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 저자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슬퍼했다. 이 책이 세상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이다. 기독교인은 고통과 아픔 앞에서 태연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받아왔다. 그것이 마치 믿음이 좋고 신실한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슬픔을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믿은 하나님에 대하여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기독교인이라고 고통 앞에서 태연할 수 없다. 저자는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상실과 고통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정립해 나간다. 그의 결론은 창조론자의 최종적인 결론과 비슷하다. 성경에는 고통의 원인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고통은 세상에 존재한다. 그는 창조론자들이 창조를 받아들이듯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슬퍼했다. 창조론자들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해 ‘하나님이 창조했다’로 끝내듯이 저자는 고통이 오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했다’로 끝냈다. 더 이상 알려고 하는 노력을 멈추었다. 거기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창조처럼 말이다. 그는 슬퍼했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파헤치는 것 대신에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아픔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더욱 사랑하기로, 성장하기로 선택했다.

저자의 태도가 기독교인의 현실 도피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이 책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단지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고통 속에서 누구보다도 슬퍼했지만 또한 누구보다도 멋지게 일어섰다. 그것은 비기독교인들이 알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신’을 신뢰함으로 가능했다. ‘고통’과 ‘하나님’의 공존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고통의 존재'와 '신이 없다'는 동의어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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