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부터 13살까지의 나를 홀린 것은 조용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생이 조용필 노래제목 30여 개를 엮은 짧은글짓기(?)를 해 라디오프로그램에 엽서를 보내고, 그 덕에 방청권을 얻어 혼자 KBS홀로 가서 차마 소리도 못 지르고 공연을 보고 올 만큼 좋아했다. 13살짜리의 마음에 무슨 서글픔이 그렇게 있었길래, 한바탕 인생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간 듯한 조용필의 서정에 푹 빠졌었을까...
14살부터 19살까지는 팝음악과 함께 살았다.
여기서도 웃긴 것은, 음악 좀 좋아한다는 친구들이 딥 퍼플이 좋냐 레드제플린이 좋냐 하고 있을 때... 나는... Earth, Wind & Fire 와 Motown 가수들이 좋다고... 차마 말을 못했다. AFKN에서 American Top 40를 주말마다 기를 쓰고 듣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1986년...! 고등학생이 된 나를 사로잡은 것은 Petshop Boys. (이거 점점 알 수 없다...) 시니컬하고 음울하면서도 늘 가슴 콩닥거리게 만드는 최고의 그루브를 선사하는 이 오빠들에게 나는 지금까지 충성을 바치고 있다.
대학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뭐, 그 당시 그랬을 수밖에 없었지만, 민중가요가 아니면 죄다 씰데없는 노래로 들렸다. 20살부터 22살까지는 거의 라디오도 안 듣고 살았던 음악의 암흑기랄까...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동자노래단, 조국과 청춘 아니면 노래 같지가 않던, 그런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윤상을 알게 됐다. 1집 <이별의 그늘>이었다. 이건 분명히 대중가요인데... 아이씨, 그냥 흔한 사랑 노래인데...! 이런 통속에 빠져들면 안 된다고 부르짖던 얼치기 운동권(?) 또치씨는 <이별의 그늘> 바이올린 선율에 곧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급스런 트럼펫 소리가 울러퍼지던 <한 걸음 더>는 그 당시 얼마나 '있어' 보였나. "변해 가는 건 변해 가야지 또다른 시간들을 남기며 표정 없이 어디에서든 잊혀지는 거지" 하던 <잊혀진 것들>의 체념은 또 얼마나 나를 덩달아 슬퍼지게 했나.
2집 <가려진 시간 사이로>도 대히트시키고 그는 군대에 갔다. 그리고 그 사이 나도 (무사히) 졸업.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고, 음반도 막 사고, 공연에도 막 다니고, 방배동을 떠나 서교동으로 옮긴 96년 무렵부터 홍대 앞 클럽에도 즐거이 들락거리고, 클래식과 국악의 현장까지 찾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나의 잡식성 음악취향은 끝간 데 없이 뻗어나갔지만, 생각해보면 내 마음 속엔 늘 윤상(적인 것)이 있었다.
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윤상의 음반은 2000년 작 <Cliche>, 2002년 작 <이사>이다.
<Cliche>에서는 먼 나라의 바람 냄새 같은 향기가 났다. <바람에게> <나를 친구라고 부르는 너에게> 같은 노래를 들으면 낯설지만 익숙한 서글픔이 느껴졌다. <결국... 흔해 빠진 사랑 얘기> 또한 지독하게 쓸쓸해서 좋았다.
<이사>는 적어도 나의 음악사에서 길이 남을 명반이다. <Cliche>에서 이미 남미 리듬을 들여왔던 그는 <이사>에서 좀더 '쎄게' 그걸 밀고 나갔다. 그런가 하면 정훈희가 부른 <소월에게 묻기를> 같은, 지극히 익숙한 정서(우리 음악 특유의 뽕기,라고 하면 실례?) 또한 첼로 선율을 깔고 세련되게 담아 냈다. 그래, 윤상의 음악을 말할 때 제일 많이 얘기할 만한 단어는 '세련미'인 것 같다. 그전시대 음악에서는 없었던, 도저한 세련미.
이제 후배들의 Tribute 앨범이라 할 만한 이런 음반도 나왔다.
물론 나도 덥석 샀다. 윤상의 온갖 세계를 온갖 방식으로 재해석해낸 재미있는 음반이다.
음... 가장 흥미로웠던 건 '소녀시대'가 있다는 건데, 윤상이 만들었던 댄스그룹 알로(Halo)가 불렀던 <랄랄라>를 다시 불렀다. (여자 보컬이 너무 인형같이 예뻤는데... <잠자는 숲속의 왕자>가 타이틀 곡이었고, <랄랄라>도 인기를 째끔 얻었었다) 그래, 소녀시대가 부를 만한 노래지. 근데, 오랜만에 원곡을 들어보니, 역시 원곡이 낫다. "이렇게 어렵지 않은 수고로도 가벼워져 버릴 만큼 난 강해져 있어 ~~ 아무렇지도 않게 콧노랠 부르며" 라는 쉽지만은 않은 가사를, 소녀시대는 너무 매끈하게만 부르더이다...
안트리오의 Lucia 와 Casker의 이준오(juno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그가 맞을 듯?!)가 싹 새로 다듬은 <이별의 그늘>도 흥미롭고, '천재소년'으로 불리던 정재일이 장구와 꽹과리 소리를 감칠맛 나게 사용한 <El Camino>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좋다. (원곡에서보다 정재일 버전에서 국악기 비트가 더 강해진 것 같다.) 배우 이선균이 살짝 서툴게 부른 <소년>도 참 예쁘다. 아, 물론 이 노래는 아무나 쉽게 부를 만큼 만만한 노래는 아니다. 이선균이 부르니까 정말이지, 말하는 것처럼 노래하더라.
정재일의 <El Camino> 다음 트랙이 W & Whale 의 <소리>인데, 그룹 W가 한국대중음악상 받을 때 '아시아 최고의 일렉트리카'란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 멋진 편곡이다. (난 사실 W 가 무조건 좋아~~)
* W가 Where the Story Ends 이름으로 내놓은 첫 앨범 <안내섬광>에는 윤상에게 바치는 <기도>라는 예쁜 곡이 있다.
강수지가 불렀던 <흩어진 나날들>은 원곡의 슬프다 못해 처연한 감성을 걷어내고, Casker가 보사노바 풍으로 다시 만들었다. 이거 멋지다. 그야말로 cool 한 재해석이다! 그런가 하면, 윤상이 신해철과 함께했던 No Dance("우리 둘다 춤이 안된다"는 뜻이었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앨범의 명작 <질주>는 Astro Bits가 그야말로 질주하는 느낌으로 휘몰아치는 편곡을 했다. 다다다다다~~ 몰려오는 비트가 사람을 아주 몽롱~하게 만드네.
워낙 기본이 좋은 노래들이라 다 듣기 좋은데, 나는 대체로 연주곡들이 더 좋네. 이렇게 한국 대중음악을 넓고 깊게 만드는 사람들이 계속 잘 살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