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엔 인제 점봉산에 다녀왔는데, 곳곳에서 억새 꽃대가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어 깜짝 놀랐다. 작년만 해도 계절이 바뀌는 것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흠 ... 나이탓일까. 변하는 모든 것이 참 속도가 빠르다 ㅠㅠ

억새를 보며 제주 생각을 했다. 10월말 11월초면 육지에선 한창 단풍 구경에 열을 올릴 때인데, 그때쯤 제주에는 억새가 가장 보기 좋다. 특히 한라산 주변을 돌아가는 산록도로 주변은 키가 큰 하얀 억새로 덮여 장관이다. 산굼부리 같은 데는 따로 억새 산책로를 근사하게 마련해 놓아서 연인끼리 "나 잡아봐라" 놀이 하기 딱 좋다 ;; 

꽃 피는 봄, 바다에서 놀기 좋은 여름, 이런 때는 제주 여행도 성수기여서 비행기삯도 비싸고 잠잘 곳도 붐비는데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11월초는 비수기라고는 하지만 제주의 정취를 누리기에 이만큼 좋은 때도 없는 것 같다. 비행기삯은 물론 숙박요금도 싼 시즌인데다, 왠지 이때는 생선도 더 맛있는 것 같단 말이지!! (방어나 갈치는 찬바람이 불어야 제맛~)  2박 3일만 휴가를 낼 수 있다면 단풍놀이 대신 억새 구경이 어떨까! 

 

억새를 찍은 게 없나 해서 봤더니, 이 사진을 찍은 날짜는 무려 12월 6일이군요...  여기가 바로 산굼부리입니다... 얼굴은 차마... 사진은 구리지만 걍 분위기가 이렇다고요 ;;

작년과 올해 '제주올레' 열풍 덕인지 제주 여행책들이 엄청 많이 나왔다. 그야말로 여행 가이드북도 있고, 제주올레를 걷고 난 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쓴 듯한 에세이+사진집들이 올여름 휴가철 전에는 반드시 나와야겠다는 듯 쏟아져 나와서 올 여름에는 그 책들을 읽느라 나름 바빴다. (정작 나는 여름에는 제주에 못 갔음) 

이 책은 올해 4월에 초판이 나왔다. 제주올레가 16코스까지 소개되어 있고(9월 25일 현재 17코스까지 열렸다), 제주시와 한라산 주변, 이름난 오름, 맛있는 집, 다양한 형태의 숙박지, 골프코스까지 컨텐츠가 방대하다. 잡지처럼 사진도 시원시원하게 잘 배치되어 있고(어떤 것은 너무 관광 홍보용 사진 같기도 하지만) 설명글도 자세한 편이다. 다만, 비싼 음식점과 호텔, 골프코스 같은 곳에 대한 설명은 너무 보도자료 같은 냄새가 나서 슬렁슬렁 넘기게 된다. (나랑 별로 상관없는 곳이기도 하고 말이지.) 

작년과 올해 나온 여행책 가운데서, 제주 여행 초심자에게 가장 권할 만한 여행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혼자 여행할 예정인 사람이나 가급적 돈을 적게 썼으면 좋겠다는 사람은 이 책에 소개되는 음식점이나 숙박지가 별로 탐탁치 않을 수 있겠다. 홀로 여행하는 분이나 알뜰한 여행책을 찾으시는 분께는 정원선의 <제주 풍경화>라는 책이 가장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 

<스타일 제주>는 <제주 풍경화> 같은 책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 봐도 좋은데, 고급스러운 제주의 명소들을 소개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재미나게 살펴볼 수도 있겠다.   

 패션 에디터 출신 저자가 쓴 책이다. 특급호텔과 부띠끄호텔, 수영장 딸린 풀빌라 리조트, 독특한 갤러리, 고급 스파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여기 소개된 곳들도 11월 비수기에 가면 비교적 싼값에 예약을 할 수 있으니 하루 이틀쯤 사치를 부리고 싶다면 가보는 것도 좋을...까? ^^ 

아, 나는 그런데 패션지의 한글 문장에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해질 생각도 없고 말이지. 포도호텔 레스토랑에 우동 먹으러 가는 김에 비오토피아에 들러 박여숙 갤러리 같은 데 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거나, 이 책에 소개된 부띠끄 호텔을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둘러보니 9월 이후에는 1박에 17만원 정도니까 한번 질러볼까 고민하게 해준다거나, 제주 전통 가옥 형태를 그대로 살린 씨에스호텔의 회원으로 가입하면 31만원에 1박 숙박권 + 자잘한 혜택이 주어진다거나 하는 정보에 귀가 솔깃하게 해준 건 고마웠으나, 설명하는 문장들이 하나하나 참... 읽다가 읽다가 나중에는 막 웃어버렸다.  

 "보오메꾸뜨르 호텔의 인테리어는 젠 스타일을 기본으로 프렌치 감성이 더해졌다." "계량화된 서비스 대신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구조와 서비스로 특별함을 더했다"  "어메니티가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 <-- 아니, 제발 좀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주세요. 젠 스타일은 알겠다고 쳐도 프렌치 감성은 어떤 것이랍니까?? 계량화된 서비스란 무엇이며 프라이빗한 서비스는 어떤 걸 말하는 거랍니까? 투숙객 각자 식성에 맞춰 아침식사라도 따로 준비해주나효?? 세면도구나 편의용품이 없었다고 해도 될걸 꼭 어메니티란 말을 써야 하나?? 이건 패션지가 아니라 단행본이니 어메니티, 컨씨어지, 이런 말은 좀 안 쓰거나 덜 쓰면 어디가 덧나나. 아아, 진짜 자기만 다 안다는 듯한 이런 문장 정말 싫다. (언어를 통해 자기가 속해 있는 계급을 상향해 보여주고 싶어하는 과시욕으로 보여 영 불편...)    

이 책 표지가 바로 11월쯤의 제주 중산간 풍경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정말 깨알같은 정보를 자랑한다. 제주 초심자가 아니라 중급 이상(?) 여행자, 남들 다 가는 곳이나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인 삐딱한 여행자, 혼자 여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많지 않은 숙소 정보에서도 새로 생긴 게스트 하우스들을 잘  소개해놓았다.) 

음,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좀 씁쓸했던 것은 1) 나 제주 좀 아는 남자야, 당신은 나만큼은 제주를 몰라, 하는 듯한 약간의 허세가 느껴지는 문체  2)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제주엔탈리즘,이라고 해야 할까... 제주에서 인생 후반부를 보내야겠다고 결심한 나 스스로에게도 그렇고, 제주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부러 경계를 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제주를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시선이다. 그런 것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제주도 결국 한국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한림에서 비양도까지 케이블카를 놓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떻게든 땅 장사 집 장사를 해보겠다는 욕망 또한 항상 들끓는 곳이다. 제주를 그저 자주 왔다갔다 할 뿐인 사람들에게는 도시의 원색적인 욕망이 탈색되고, 추억 속의 여성들을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삶을 꾸리고 돈을 벌며 살아갈 곳이 아니라 소비하고 떠날 곳이기 때문에 그저 얼마간 머무는 아름답기만 한 곳일 수 있다. 이 책은 사진도 글도 아름답다. 하지만 '타자'의 시선일 뿐이었다. 정색하고 쓴 여행책 <올레! 제주 여행 바이블>이 훨씬 더 건강한 시선으로 느껴졌다. 

올레를 걸은 이야기를 책으로 낸 건 이제 너무 많아서, 앞으로 책을 낼 사람은 제주 전체를 돌아가는 올레 코스가 완성이 된 다음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하듯 전체를 다 돌아보고 책을 내야 할 성싶다. 

 

 

 

 

 

 

 

 

 

 

 

 

 

 

 

우앙... 정말 많다...!  어린이용 만화책까지 나왔으니... 

이 가운데는 '흠, 이건 일기장이면 족한데 왜 책으로 냈을까' 하는 것도 있었다. 올레 책들에 대해선 일일이 코멘트하기가 벅차다. 올레에 대한 정보를 굳이 이 책들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한 코스 정도를 그냥 걷고 나면 이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다 쓸데없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억새가 피는 가을이다. 제주에 가기 좋은 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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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0-09-28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초의 산굼부리는 저런 분위기군요. 여름겨울 빼고는 휴가가 없지만, 1박2일이라도 휙 다녀오고 싶어집니다.

또치 2010-09-28 09:25   좋아요 0 | URL
네, 바람 쐬고 오는 거 좋죠!! 저도 가끔 토요일 아침 비행기로 휙 갔다가 일요일날 저녁에 돌아오기도 하고 그런답니다 : )

치니 2010-09-2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으, 영국만 아니면 11월에 무조건 지르는 거였는데! 하지만 내년에 꼭!
우선 위 책들 중 두 권 보관함에 넣었구요, 올레 관련 글은 쓰지 말아야지 ㅋㅋ 결심했고요,또치님이 나중에 내려가시면 거기서 제주 관련 책 소개하는 작은 도서관 하나 만들어도 (오프로) 참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앙앙 좋아요.

또치 2010-09-28 13:41   좋아요 0 | URL
도서관도 이미 많고, 북까페도 이미 많고... ;;
뭔가 창의적인 걸 해야 할 텐데요, 끄응!

2010-09-28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또치 2010-09-28 13:42   좋아요 0 | URL
네네네!! 저도 연휴 페이퍼 잘 봤어요. 걸으면 마음속에 잡념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많이 걸어요, 우리!!

레와 2010-09-2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제주..!

또치 2010-09-28 13:42   좋아요 0 | URL
혹시 침이 고이셔서 그런 거? : )

마노아 2010-09-28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해요! 10월 말에 엄마는 제주 여행을 준비하고 계신데 억새를 잔뜩 보고 오실 수 있겠어요. 나도 막 날아가고 싶어요. ^^

또치 2010-09-28 13:43   좋아요 0 | URL
와, 딱 좋을 때 여행 가시네요. 산굼부리 꼭 가보시라 말씀 드려주셔요. 좋아하실 거예요. 근처 비자림도 좋고, 그 동네(조천 교래리)에는 토종닭 요리 잘하는 집도 있거든요~

바이런 2010-09-28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여름 끝자락에 제주도에서 정말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 페이퍼 보니까 또 가고싶어요 ㅠㅠ 끝없는 제주앓이..가을의 제주도 역시나 근사하겠지요? T_T 가고싶다!!

또치 2010-09-28 13:44   좋아요 0 | URL
흐르는 눈물이 느껴지는 댓글이네요 ㅠㅠ
우리 호시탐탐 다시 갈 기회를...

2010-10-14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