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이 되기 전에 꼭 해보라고 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낯선 곳에서 석 달 이상 살아보기'다. 나는 철이 늦게 들어서 서른둘에 방황을 가장 심하게 했다. 그때 오사카에서 보냈던 석 달, 처음으로 혼자 밤기차에서 자고 다니며 홋카이도까지 올라갔다가 배를 타고 다시 교토로 내려왔던 여행을 잊지 못한다. 비로소 나 혼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때를... 

외국어도 자신없고, 어디 가고 쉬고는 싶은데 딱히 가고 싶은 나라도 없고... 하다면 제주도에서 살아보라고 한다. 도시의 편리함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제주 신시가지의 오피스텔을 얻으면 되고(한 달 단위로 단기임대가 되는 원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월세 50만원 안팎), 이방인이 된 느낌을 조금 더 진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옛날 북제주군 쪽이나 서귀포의 한적한 동네에서 살다 오면 좋을 것이다. (민박을 하는 집에서 한달 이상 장기로 묵겠다고 하면 월 25만원 정도에 살 수 있다)     
어디에 살든 차로 30분이면 바다에 갈 수 있고, 몸 고되게 등산하고 싶다면 한라산에 오르면 되고, 마음이 심란해 바람 좀 쐬고 싶다면 360여 개나 되는 오름 가운데 하나에 올라 실컷 바람을 맞으며 꺽꺽 외로움을 토해낼 수 있다. 명상에 잠기기 좋은 포인트가 사방에 널려 있다. 좀더 한적한 섬으로 가고 싶다면 가까운 가파도, 비양도 등으로 배를 타고 가도 좋다. 육지 음식과 좀 달라 처음에는 낯설 수 있지만, 생선과 돼지고기와 해조류가 들어간 음식이 뭐든 다 맛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하루에 다섯끼씩도 먹고 싶어진다. 동네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구경만으로도 신난다. 서울에 가고 싶다면 공항이 그리 멀지도 않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나는 제주시가 춘천시보다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껴질 정도.) 여름이 상상을 초월하게 습하다는 것, 겨울 바람이 생각보다 매섭다는 것 빼고는 제주의 자연환경에서 단점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제주가 좋아서 정말로 제주에서 몇년간 살았던 사람들이 쓴 제주 여행기들 가운데 두 권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여행자의 자세와 생활인의 입장이 섞여 있는 이런 책들이 요새 많이 나오고 있다. 어쩌면, 누구라도 제주에 오래 살면 책을 쓰고 싶어질 것 같다. 제주는 그런 곳이니까... (진짜로 몸을 움직여 책을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 이들에게 우선 박수를!) 

이 책의 지은이는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가 지친 어느 날, '이런 곳에서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제주로 떠났다고 한다. "1년 있다 올게~" 했지만 2년을 있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섬을 잘 모르겠다고... 

지은이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대로 "제주의 참다운 맛과 멋은 유명 관광 명소에 있지 않다. 바닷가 작은 마을과 동네 사람들이 들르는 소박한 식당, 네비게이션의 실수로 우연히 접어든 한적한 오솔길이야말로 제주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간직한 곳이다." 라는 말에 동감하며 이런 여행을 하고 싶다 생각한다면 제주에 가기 전에 이 책을 보면 좋을 것이다. (저 말은 다른 모든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만...)

제주의 곳곳을 서쪽 해안 / 서귀포 / 한라산과 중산간 / 동쪽 해안 / 제주시 권역으로 나누어 얘기해주고 있는데  잡지사 기자로 일했던 젊은 여성이라서 그런지, 사진도 참 아기자기하고 내용 설명도 비교적 꼼꼼하다. 걷기 좋은 곳, 생각에 잠기기 좋은 곳 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서 아이의 '체험학습' 결과물을 가져가야 하는 가족 단위 여행자나 (드라이브나 낚시 등을 즐기는) 남성보다는 혼자서 혹은 많아야 서넛으로 여행할 아가씨들의 취향에 어울릴 것 같다. 지은이의 관점에 동의만 한다면, 제주에 처음 가보는 사람에게도 기꺼이 추천하고픈 책. 일정은 짧지만 이름난 명승지는 다 돌아봐야겠다는 사람에게는 비추. 숙소와 식당 정보가 짧게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주로 볼 것 위주로 쓰여 있다. 그리고 대중교통보다는 렌트카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보는 것이 좋겠다.  

잠깐 딴 얘긴데, 난 '체험학습'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이 불편하다. 그냥 '물놀이장'이라고 하면 될 텐데 '물놀이 체험장'이라고 써놓은 걸 보면 우습기도 하고. 귤 따기 체험, 도자기 체험 ... 여행지가 될 만한 곳에 가면 사방이 '체험'장이란다. 이 말은 그곳과 나(혹은 아이들) 간의 거리를 영원히 낯설게 벌려 놓는 말 같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말이니 계속 이러겠지. 좀 슬프다.  

 <제주 풍경화>는 책 제목에서 주는 느낌이 별로 없어서 '뭐 별거 있겠어' 하고 보았는데, 의외로 참 좋았다. 제주 초급자용은 아니고 제주 여행 중급자(?) 이상에게 추천. 다른 책에서 잘 볼 수 없는 정보가 꽤 많았다. 최근에 나온 책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작년 6월에 개관한 제주도립미술관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를 잘 얘기해줘서 내 마음도 므흣.  

또 딴 얘긴데, 제주에 가면 커피 마실 곳이 별로 없어 아쉽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지금은 곳곳에 좋은 카페가 많이 생겼다. 내가 추천하고픈 곳은 제주시의 '이레하우스'라는 곳과 제주도립미술관 커피숍이다. 제주도립미술관 커피숍은 물과 산이 어우러진 풍광이 너무 좋아서 '아아, 여기서 하루 종일 된장녀 놀이 하고 싶다아...' 생각했던 곳 ^^  미술품 관람도 좋지만, 여기는 커피숍 때문에 또 가게 될 거 같다.

다시 책 얘기!  이 책의 지은이는 73년생 남자이고,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숨을 돌리러 내려갔던 제주에서 '삶의 거처를 이곳에 두고 싶다'고 생각한 뒤 정말로 섬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대형 서점의 인터넷서점 컨텐츠 기획과 서비스 일을 하면서 1년에 십여 차례 서울을 오가며 산다고.  

그런데 이분은 '제주올레' 열풍이 살짝 못마땅했나보다. 뒤표지를 보니 '제주도' 하면 그저 '올레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라고 쓰여 있는데, 흠... 뭐 이렇게 도전적일 필요까지 있나 싶기도...  올레길을 한번 제대로 걸어본 사람들이라면 제주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할 텐데 말이다. 사실 올레라는 게 제주의 집앞 길을 가리키는 말이니, 제주에 살면서 여기저기 골목골목을 숱하게 돌아다녔던 사람들은 별스럽지 않게 다니던 길이 갑자기 올레길이 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마뜩찮았을 수 있겠다 싶다. 작정하고 '올레길'말고 다른 곳들을 소개해야겠다 마음먹은 것이 여러 곳에서 느껴진다 ^^ 

내가 이 책을 무엇보다 좋게 본 것은 '공정한 여행'을 위한 갖가지 세심한 서술 때문이다. 맛있는 횟집을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시장에서 싱싱한 생선을 사다가 요리를 해먹어보라는 권유나, 이왕이면 좌판을 펼치고 있는 할망들에게 먹을거리를 구입해보라는 얘기,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숙소를 꼼꼼히 소개하는 대목들이 자못 감동적이다. 그리고, 차를 갖고 다니지 않을 사람들을 위한 버스 정보가 정말 자세하다. 제주에 사는 동안 버스만 이용하면서 여기 쓴 모든 곳들을 걸어서 가보는 확인작업을 거친 끝에 나온 정보라고.    

총 40여 곳을 소개하는데, 꼭지마다 '볼멍놀멍'(주변의 볼거리, 놀거리) '잡술멍'(음식점) '쉴멍'(숙박업소) '탈멍'(그곳으로 가는 대중교통편) 정보가 아주 꼼꼼하다. 제주 여행책을 숱하게 보았지만 이렇게 자세한 책은 처음 보았고, 특히나 숙박지 정보는 지역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박집과 비싸지 않지만 경치 좋고 소박한 풍광을 지닌 펜션과 호텔 들을 정말 잘 소개해주었다. 비수기 기준으로 1박에 10만원을 넘지 않는 곳들이 대부분이고, 어느 곳은 직접 홈페이지에서 예약해야 싸고 또 어떤 곳은 여행사를 통해야 싸다는 정보도 잘 소개해서 앞으로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난 빌붙을 곳이 있긴 하지만... ^^ 내 취미는 내가 좋아하는 곳의 숙박지 검색이거든요~) 

다음에는 육지에 살면서 제주를 자주 왔다갔다하는 여행(전문)작가들이 쓴 제주 여행책을 정리해볼 텐데, 음... 사실 나는 제주 사람이 쓴 <제주 여행법>이 가장 좋았고, 그 다음으로는 이 페이퍼에 소개한 두 책이 좋았다. 그래도 제주의 여러 가지 모습을 소개해주는 책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왠지 바쁘네. 아, 얼른 제주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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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 2010-08-30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첫번째 책에 홀딱 반했던 사람. 작년에 다녀왔는데, 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주병을 앓아요. 지금도 이 페이퍼를 읽으면서, 아 딱 한 달만 살다오면 좋겠다. 하루에 한끼 라면만 먹고, 한 달 민박집 25만원, 저가항공 왕복이면... 이렇게 계산을 하다가,
아, 우리 아이들은 어쩌지ㅠㅠ
이런 생각을 혼자 아주 짧게, 그러나 아주 심각하게 했답니다.
그런데, 이 페이퍼가 연재라는 거죠?
죽이십시오-_ㅠ

또치 2010-08-30 21:29   좋아요 0 | URL
제가 언젠가 제주에 집을 얻어 놓을 테니 그때 걍 애들 델꼬 내려와 놀다 가세요.
큰애는 제주에서 학교까지 보내시고, 음하!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친구들에게 방 한 칸 내주고, 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밥도 같이 먹으면서 좋은 글 멋진 그림 그리고 가라고 토닥토닥해주며 사는 게 제 꿈 가운데 하나...

치니 2010-08-3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쯤 되면 제주시에서 또치님에게 민간인 홍보대사 임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 정말 추천 10개가 모자랍니다.
흠, 월 25만원도 땡기네요, 년세로 처음부터 살려면 조금 부담스러울 거 같고...

또치 2010-08-30 21:31   좋아요 0 | URL
어떤 부부는 귤 농장 하는 집에서 귤 좀 봐주는(?) 조건으로 농장에 딸린 집을 걍 얻어 살기도 했더라구요. 사는 데는 참 여러 방법이 있나 봐요 ^^

마노아 2010-08-3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치님의 제주 사랑도 누구 못지 않군요. 다음 편이 또 있으니 기대감으로 돌아가요~

또치 2010-08-30 21:36   좋아요 0 | URL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자꾸 먼곳에 마음이 쏠리나봐요. 그렇다고 거기가 낙원은 아닐 텐데... 뭐 이런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해요. 근데 가면 갈수록 마음이 끌리는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마노아 님 방학 때 꼭 가보세요~~~ ^^

코코죠 2010-08-3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친구들에게 방 한 칸 내주고, 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밥도 같이 먹으면서 좋은 글 멋진 그림 그리고 가라고 토닥토닥해주며 사는 게 꿈 가운데 하나라니요... 아아, 저도 또치님의 절친이 되고 싶어요.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으로라도 있다는 게 너무나 영광이에요. 또치님은 뭘 드시고 살길래 이리도 멋진가요, 정말. 이토록 뭉클하신 분이라니 맙소사!

또치 2010-09-01 09:16   좋아요 0 | URL
안빈낙도를 좋아하실 것이 분명한 오즈마님도 대환영!!!!!

2010-08-31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1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7 0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