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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문화예술 - 통합의 가능성을 꿈꾸는 KAIST 사람들 ㅣ 현대의 지성 100
최혜실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앨빈토플러는 <제3물결>에서 정보화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했다. 농업사회, 산업사회의 질곡을 넘어 새로운 세계는 정보의 소유관계에 따라 세계가 이해되고 작용되리라는 견해였다. 이미 우린 그 헤어날 수 없는 숙명(?)속에 들어와 있는 듯 싶다. 이전의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따른 사회계급의 형성과정과 권력의 이동관계는 이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다양한 정보의 유무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
이 보이지 않는 혁명 속에 디지털은 그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과 냉전시기를 거쳐 자본주의가 이른 종착은 더 많은 지식과 정보의 요구였다. 그것은 개개인의 이해를 넘어선 사회적 필연이 되고 있다. 이미 시장은 세계로 확장되어 있었고, 과학은 그 끝을 규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지식 그 자체가 자원으로 치부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지식의 지배>에서도 저자는 ‘이제 부는 지식이 결정한다’고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인간은 그 방대한 지식의 활용으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그 일을 대신하는 기계들을 제어하는 정보처리자로 둔갑하여, 그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푹 젖어 있다. 컴퓨터라는 필수품은 이제 TV만큼이나 친숙한 생필품이 되었으며, 인류는 이 전자회로의 덩어리로 ‘먹고 살 수’있게 되었다. 이른바 ‘디지털 정보시대’의 개막이다.
미래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청사진이 언제나 장밋빛일거라는 기대는 최근의 각종 문제제기를 통해 보기 좋게 무너진다. 컴퓨터의 발달로 이제 떼어낼 수 없는 영상기술, 오락문화의 발전은 그 선전성과 폭력성으로 한계에 이르렀고, 이제 인간을 무자비하게 휘둘러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 최근의 한 조사에 의하면, 뇌를 반복되는 폭력의 무차별한 수용은 도덕적 판단 기준을 무너뜨리게 된다고 한다. - 또한 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집중된 정보가 가져올 수 있는 그 막강한 권력의 위용에 대해서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실지로 이미 디지털 정보들은 우리사회의 여론을 조정해가고 있고, 이 집단의 무자비함은 어떤 경우 개인을 완전히 매장시켜 갈 수도 있게 된다.
이는 디지털 매체의 그 신속성과 직관성으로 인해 기존의 인쇄매체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정보의 독점이 우려되는 시기를 넘어, 일개 기업이나 유능한 정보기술자의 손안에 세계의 안보가 위협받게 되는 시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제러미리프킨은 <소유의 종말>을 통해 이를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사람들이 친구를 잃어가고, 이웃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주위 세계에 적응하고 주변 사람을 이해하려면 일관된 참조의 틀이 있어야 하는데 이 틀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끈끈한 인간적 관계의 경험과 참을성 있는 주의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간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인격체의 등장이다.
무엇이 정말 진정한 행복인가? 이 화두는 이제 인류의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최근에 세계 도처에서 등장하는 플럼빌리지, 오로빌, 떼제, 우드브룩, 토요사토, 핀드혼 등등 이러한 갖가지 공동체의 모습들은 바로 이러한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고유의 가치와 속성들은 필연적으로 소통과 연대를 요구한다. 이제 그 소통의 매개가 인간 자체인지 디지털 컴퓨터 기술인지에 대한 판단의 시대로 들어선다. 선택은 계속되고 있다. 쉽게 결론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가 이론(異論)없이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의 행복 그 유토피아는 디지털 정보시대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나무와 하늘과 땅과 벗이 되는 삶 속에 있을 것인가? 세계는 이미 컨베어벨트 위에 있다. 이 벨트를 돌리고 있는 것은 디지털이지만, 인간은 이 벨트를 멈출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멈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