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chaire > 때이른 '풍장의 습관', 아직 덜 메마른...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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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여름이던가, 나희덕의 네 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과 기타 등등 몇 권의 시집을 산 기억이 난다. 호주에 공부한답시고 내려간 친구에게 가볍고도 무겁게 항공선물을 해야 할 것이 필요했기에 시집을 대여섯 권 고른 것이다. 공교롭게도 남자 시인 셋, 여자 시인 둘... 정도를 산 것 같은데, 응큼하게도 시집을 사면서 세 권만 보낼 테야, 두 권은 내가 먼저 읽고 보내든지 말든지 할 테야, 했었다. 결국 나는 내 욕심대로 했고 그때 내 손에는 나희덕과 허수경이 남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두 시집 모두 썩 마음에 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나희덕은 그 무렵, 지나치게 서정시인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봄이면 초록가지를 노래하고, 여름이면 비를 노래하며, 가을엔 나비를 노래하는 식이다. 겨울에는 당연히 눈(雪)을 읊는다. 아,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 풍경을 노래한 시들 중, 별반 마음을 잡아끄는 시가 없었다는 변명.

‘어두워진다는 것’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는 표제작인 ‘어두워진다는 것’, 이 시에는 풍경 이후의 풍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5시 44분의 방이 / 5시 45분의 방에게 /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 / 몸을 비추던 햇살이 /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 나무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 가만, 가만, 가만히 /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오늘 나는, 어두워진 사람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비교적 젊은 아낙의 삶을, 아직 많이 남은 어머니의 삶을 애써 버리고, 그다지 오래 서 있지 못했던 뼈와 살을 버틸 힘 없어 버려야 했다. 근래 들은 소식 가운데 가장 가슴 아픈 소식이었는데, 아뿔싸, 나는 너무나 태연했다.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는 것도 시인은 저렇게 시들시들 아프건만, 나는 지인의 죽음을 듣고도 풍경이 퇴색해 보이지 않았다. 점심밥도 맛있었고, 저녁밥도 맛있었고, 텔레비전도 재밌었다. 산다는 건 뭐냐, 고도 묻지 않았고, “가슴이 너무 아파”라고 말하며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를 멍하니 흘려들었다. 아마 이것이, 갑각류가 되어가는 과정일까.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이라며 미세한 시간의 흐름을 포착해내던 시인은, ‘사라진 손바닥’이라는 시집을 내놓고는, 자신이 흡사 ‘도덕적인 갑각류’가 된 것 같다고 고백한다. 갑각의 관념들을 직조했다는 ‘사라진 손바닥’의 시들은 과연, 풍경보다도, 풍경 안의 영혼보다도 관념과 철학을 앞세우고 있는 것도 같다.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 /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 / 그것을 섬이라고도 할 수 없어 여, 라 불렀다”는 ‘여, 라는 말’이라는 제목의 이 시를 나는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나희덕의 시답지 않게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시인의 영혼에도 때로는 마른버짐 필 때가 있는 게다. 내가 보기에 ‘사라진 손바닥’은 시인의 영혼에 끼여들기 시작한 부스럼의 증거가 아닌가 싶다. 그것이 도덕적 갑각인지 관념의 먼지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런 이유로 나는 몇날 며칠 이 시집을 들고다니면서도 별루 정이 안 가기도 하고,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으면서, 또 한편 위로를 받았다. 시인도 메마르는 거구나. 나의 메마름을 용서해줘도 되겠구나, 하고... 그런데 이건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었고, 시인은 부러 그렇게 메말라질 필요가 있어서 그리 됐다는 듯이 스스로 쓰고 있다.

“존재가 시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썩는 것과 마르는 것. 아름다움이 절정을 다한 뒤에도 물기가 남아 있으면 썩기 시작한다. 그것이 꽃이든 음식이든 영혼이든. 그러나 썩기 전에 스스로 물기를 줄여나가면 적어도 아름다움의 기억은 보존할 수 있다. 이처럼 건조의 방식은 죽음이 미구에 닥치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영속성을 얻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 대단히 그럴 듯하다. 건조함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핑계가 아닌가 하고 힐난하면서도 역시 시인은, 관념의 뒷간에서도 보석을 찾아내는 고집덩어리구나 새삼 감탄스럽다. 그렇다 해도, 이미 시인은 자신의 존재가 시드는 걸 알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걸 감지하는 시인의 저 유려한 변명은 그래서 더욱 서글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에는 한 귀퉁이 접게 만드는 시가 제법 된다. 나희덕의 뿌리 깊은 내공을 그 어떤 사막의 모래바람이 함부로 파괴해버리겠는가. 아직 덜 메마르고 덜 시들어서 아름다운, 따스함을 버리고 택한 메마름의 길에서조차 그 나름의 평안함을 직조해내는 시인의 건재함은 ‘풍장의 습관’ 같은 시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 “방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 책상 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 그들은 향기를 잃는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 / 모른다고, 단단한 껍질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려본다.”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고 시인은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것은 그가 이제 고통과 소진의 향기마저도 죄다 뿜어보았다는 뜻일 테니! 그래도 나는, 아직 나희덕에게서 도도함보다는 따뜻함을 바라는 것 같다.



<겨울아침>


어치 울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눈 부비며 쌀을 씻는 동안

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


어미새가 소나무에서 단풍나무로 내려앉자

허공 속의 길을 따라

여남은 새끼들이 푸르르 단풍나무로 내려온다

어미새가 다시 소나무로 날아오르자

새끼들이 푸르르 날아올라 소나무 가지가 꽉 찬다

큰 날개가 한 획 그으면

模畵하듯 날아오르는 작은 날개들,

그러나 그 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곧 오리라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

이렇게 새끼들을 기르며 살고 있다고,

쌀 씻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창 밖의 날개 소리가 시간을 가르치는 아침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한 생애가 가리라

 

나희덕의 시가 주는 가장 큰 감동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나는 거푸 생각한다. 삶의 장면 속 깊숙한 곳으로 투명하게 스며드는 시선, 지나가는 나비나 붉기만 한 꽃을 시적 치장으로 뒤범벅하거나, 관념의 갑각을 뒤집어씌우는 게 아닌, 정직하게 자기 모습 그대로 따스해져버리는 것, 포기하듯 시를 쓰는 것, 시인이 썼다기보다는, 시인에게 들켜버린 것 같은 시를 쓰는 그녀, 덕분에 갑각의 안쪽은 아직 따스한 거다.

그리고 이제, 이문구 선생에게 이미 바쳐진 다음 시는 먼저 어두워진 누군가를 위한 나의 조문이라고 해두자(잘 가요, 언니, 언니가 어릴적 제게 사준 하얀 스웨터는 아직 내 가슴의 겨울에 온기를 준답니다).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 전화를 받고 역으로 달려갔다 / 배가 고팠다. /죽음의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이 시장기라니. / 불경스럽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팠다. / 기차시간을 기다리며 허겁지겁 먹어치운 / 국밥 한 그릇. / 벌건 국물에 잠긴 흰 밥알을 털어넣으며 / 언젠가 下棺을 지켜보던 산비탈에서 / 그분이 건네주신 국밥 한 그릇을 떠올렸다. / 그를 만난 것은 주로 장례식에서였다. / 초상 때마다 護喪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온 그가 / 이제는 고단한 몸을 뉘고 숨을 내려놓으려 한다 / 잘 비워낸 한 생애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 그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국밥 한 그릇을 / 눈물도 없이 먹어치웠다. / 국밥에는 국과 밥과 또 무엇이 섞여 있는지, / 국밥 그릇을 들고 사람들이 /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둘러 삼키려는 게 무엇인지, / 어떤 찬도 필요치 않은 이 가난한 음식을 / 왜 마지막으로 베풀고 떠나는 것인지, / 나는 식어가는 국밥그릇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 <국밥 한 그릇 - 故 이문구 선생님을 생각하며>


--- 2004. 11. 1.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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