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김기선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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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80년대 대학가에서 한번쯤 마주쳤을 만한 꼭 그만한 학우였다. '그래, 나는 비로소 살아있다. 투쟁속에서, 이 살아있음의 감격과 해방감을 지켜내기 위해, 나는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혼과 몸을 다해.' 그맘때쯤 누구나 한번 품었을 고민들, 번뇌들을 안고 그는 현장으로 뛰어든다.. 다만 그는 숨죽이지 않았고, 턱까지 숨이 차오르자, 자신의 목숨으로 항거했다.

눈물겨운 건 박선영의 숭고한 죽음이 아니었다. 이땅의 수많은 열사들. 그들과 어깨 겨루자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오히려 우리를 눈물겹게 하는 건 살아남은 자들, 아무런 준비없이 맨몸으로 감당해내야 했던 역사의 무게, 마스크와 치약을 들고 최루탄을 쫓아 다니는 그 어미의 호소력 짙은 삶이었다. 자식이 지 목숨보다 소중한 조국을 남겨두고 갔다고.. 그 약속을 잊지 않겠다고.. 민주화는 안방에서 오는 게 아니라 대가리 하나라도 모타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절규하는 그 어미를 위해 나는 울었다.

자신의 억지주장으로 서울교대에 입학해 그 험한 꼴을 당했다고, 그 완고하기만 하시던 아버지는 전교조 지역대표로, 한겨레신문 후원모임을 이끄는 원로로 곡절많은 세월을 보낸다. 큰언니 화진은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유가협 활동, 동생 추모제를 비롯한 집안 대소사를 치러내며, 큰오빠 종욱은 제대후 곧바로 발령을 받고 전교조활동을 시작하여, 전교조 중앙위원, 고흥지회내 문화 분과대표로 활동하는 중이면서 전남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부자간에 전교조 활동을 하는 최초의 가정이란다. 동생 의석은 미국 신시네티의 한 대학으로 유학을 가기전 남은 8개월 동안 제 누이의 안식을 기릴 '소의재' 건립에 앞장선다.

꽃다운 스물의 혈기로 쓰러져 간 박선영. 그의 죽음은 한 민중의 딸의 죽음이 어떻게 한 가족을 역사의 소용돌이로 휩쓸리게 하는지를 절실히 보여준다. (본문 中 '너는 이렇게 죽었어-아버지'편을 눈여겨 보라. 그리고 그들을 위해 맘껏 울어주길 바란다..) 온가족이 이제는 투사로 전사로 탈바꿈한 이 가정을 지켜보며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씁쓸한 현대사.. 그 비애의 단면을 실감하게 된다. 하여 박선영이란 개인의 투쟁의 일면들을 살펴보는 것보다 그 가족의 현재의 삶을 되짚어 보는 것으로 우린 더 큰 상처를 보듬게 된다.

1997년 가을. 전라남도 구례군 지리산 자락에 박선영 열사 기념관 '소의재'가 건립되었다. 허나 그녀는 거기 있지 않았다. 얼마전 다녀온 광주에서 나는 박선영을 보았다. 광주시 북구 운정동 5.18구묘역 민중민주열사묘역, 이한열 열사 바로 옆에 박선영은 누워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아무것도 아직은 끝난 게 없다고 그는 부릅뜬 눈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박선영처럼 살고자 했다. 정말 그랬다. 나도 그처럼.. '뛰면서', '바쁘게', '고달프게', '아프게' 살고 싶었다. 아직은 진행형이란 게 겨우 위안이 될 뿐 언제나 반성의 자리에선 자신을 힐책하게 된다.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닌데, 난 벌써 저만치서 팔짱끼고 서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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