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일기 3 : 불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오덕 일기 3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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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이오덕 일기>가 들어와 있는 걸 보고 한 권 집어들었다. 한때 이오덕 선생이 쓰신 <우리글 바로쓰기>를 정독하며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이 책을 보게 될 가능성도 줄었을 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일기를 정리한 3권을 빼내어 잠깐 훑어만 보려고 했다. 내 어리고, 치기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에 이오덕 선생은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데군데 읽어 본 글들이 너무나 울림이 커서 결국 빌려와서 읽고 있다.

 

87년 민주화 운동 때 선생을 비롯해서 문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이 일기를 통해 마치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간 듯했고, 김지하가 '저주의 굿판을 집어치워라'고 했을 때 이오덕 선생과 문인들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 내막이 드러나 있다. 일기에 따르면 당시 고은 시인이 회장으로 있던 작가회의에서는 김지하 시인의 제명까지 결의했다고 나온다.

반면에 3권에서 이오덕 선생이 칭찬하고 좋게 본 작가들은 김유정, 김남주, 리영희, 백석, 그리고 권정생 선생 등이다.

 

한 사람의 일기가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헌이 되는지는 잘은 모르지만, 잠깐 살펴본 이 일기 몇 줄만으로도 한 시대를 뚜렷한 방향과 사상으로 살아갔던 인물의 기록은 엄청난 무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한가하다면 이 다섯 권 일기를 경건한 마음으로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 정독하고 싶다. 

 

 

초록

 

1987년 6월 20일 토요일

......

오후에는 종로 2가에서 송현 씨를 만나려고 현실문제연구소에 갔더니 송현 씨가 민음사 앞에 있다고 해서 그 사무실에 있는 젊은이 한 분과 그쪽으로 가는데, 조금 전에 왔던 수협 건물 앞에서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나와 같이 가던 젊은이가 박수를 쳤는데 나는 한 손에 우산을 짚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아이들의 그 씩씩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화락 쏟아지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아, 이 젊은이들이 있어 우리 겨레가 살아 있는 것 아닌가. (91)

 

1987년 6월 26일 금요일

......

... 이쪽저쪽 인도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지켜보면서 박수를 치고, 함께 구호를 외친다. 겨우 빠져나가는 버스 안에서 승객들이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든다. 아, 이 광경, 이 역사적인 광경. 나는 최루탄 가스의 눈물이 아니고 진짜 눈물이 났다. 나도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었다. 좀 더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길을 메우고, 교통을 차단시켜 아주 마음껏 외치고 뛰고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안 된 것은 오늘 관공서고 기업체고 모조리 직원들의 발을 묶어 놓고 있는 데다 대회장에 못 들어오도록 전경들을 이중 삼중으로 배치하고 전철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97)

 

1987년 11월 6일 금요일

......

차숙이는 오늘 그 지역 일대에 정전이 되는 바람에 공장이 쉬게 되었단다. 오늘 쉬는 대신 모레 일요일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공장의 시설, 관리자들의 횡포 같은 것을 들으니 너무 기가 막혔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이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떤 종교인이고 문인이고 정치인이고 그는 인간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위험하니 노태우를 찍어 줘야 한다고 말한다니, 이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노예근성으로 길들여 놓았는가 알 수 있다. 노예사회가 결코 옛날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도시는 거대한 노예 도시로 노예국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129)

 

1987년 12월 18일 금요일

......

지하도를 지나는데 내 옆을 가던 어떤 여자가 "선거가 잘됐는데, 학생들이 무슨 재미로 또 데모를 하노"해서 내가 "선거가 잘됐다고요? 모르고 그런 말 마시오!" 했다. 그런데 내 뒤 어디에서 또 여자 목소리가 났다. "미친 것들 또 데모를 하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니 거리 곳곳에 전경들이 무리지어 서 있었다. 오늘 시청 앞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지만, 거기엔 아침부터 철통같이 경비를 한 모양이다.

집에 와서도 아무것도 손에 걸리지 않아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134)

 

1988년 3월 24일 목요일 맑음

뜻밖에 오늘은 아침에 한길사 사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나를 단재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축하한다고 했다. 나는 놀랐다. 내가 무슨 단재상을 받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단재상을 어떤 사람에게 주는지 알지 못하지만 내가 도대체 무슨 상 받을 일을 했는가? 그리고 나는 단재의 책을 한 권도 읽은 바가 없다. 전집을 사 놓고도 못 읽었다. 어떻게 내가 그 상을 받겠는가? (149-150)

 

1988년 5월 22일 일요일 비

온종일 쉬어 가면서 교단 일기를 옮겨 썼더니, 밤 9시 반이 되어 드디어 한 권 분량(약 1,300장)을 마쳤다.

이 일기를 옮겨 쓰면서 생각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몇십 년 옛날에 써 둔 것을 읽으니, 잊어버리고 있었던 온갖 일들이 되살아난다. 참 이런 일도 그때 있었구나, 이건 이렇게 했던 게로구나, 하고 여러 가지를 깨닫고 알게 된다. 사람의 머리로 기억해 둔 것은 너무나 빈약하고, 모호하고, 잘못되어 있기도 하다. 일기를 적어 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알게 되었다.

둘째, 그 옛날의 삶을 기억만으로 회상할 때는 즐겁게 달콤하기도 한데, 일기를 읽어 보니 참으로 괴롭게 살았구나 싶다. 나는, 지금 내가 다시 젊어진다고 해도 내 지난날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그만큼 내 과거의 교직 생활은 고뇌에 가득 차 있다.

셋째, 그러나 그 옛날의 일기를 하루하루 읽으면서 옮겨 쓰면서, 지금의 삶과도 비교해 보고, 마치 그때로 다시 돌아가 내가 살고 있는 듯한 심정도 들어, 그것이 그처럼 괴롭지만 그 괴로움을 단지 마음으로 되씹는다는 것이 어떤 즐거움이기도 하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나는 일기를 읽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두 시간을 한꺼번에 체험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도 일기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일기를 옮겨 쓰는 것을 귀찮은 일거리로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일로 여기면서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지금의 일기를 쓰는 것도 즐거움으로 여겨야겠다. (165-166)

 

1989년 6월 8일 목요일 비

아침에 셔츠를 빨았다. 비누를 묻혀서 자꾸 치대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렇게 무엇을 생각하면서 손으로 치대는 것이 참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빨래를 다 마치고 그것을 걸어 둘 때도 즐겁지만, 다 마른 것을 거두는 것도 기쁘고 깨끗이 빤 옷을 입는 것도 기쁘다. 그래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여자들이 오래 사는 것은 바로 빨래를 하기 때문이라고. 참 엉뚱한 생각이지만 이건 재미있는 시적인 생각이라, 시를 한 편 써 보고 싶었다. '빨래'란 제목으로. (219)

 

1990년 1월 5일 금요일 흐림

......

권정생 선생 집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 좀 지났다. 강아지 뺑덕이가 훌쩍훌쩍 뛰어 반겼다. 권 선생은 몇 달 전부터 간에 대한 약을 먹고 있는데, 전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잠시 누구와 앉아 이야기하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요즘은 그렇잖다고 했다. 일직 장터까지 나갔다가 오는 것도 된다고 했다. 단지 갔다 오면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고 손가락 끝이 저리다고 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겠지. 아무튼 간이 회복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렇게 간이 나빠진 것을 모르고 지금까지 있었으니! 20몇 면 동안 계속해서 결핵 약을 먹었으니 그 약의 해독이 이렇게 사람을 못쓰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린다는 약이 도리어 사람을 잡는 독이 되어 있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권 선생은 저녁밥을 해 왔는데, 간고등어 구운 것이 그렇게 맛있었다. (245)

 

1990년 4월 6일 금요일 맑음

......

... 공 박사는 여전히 기계화 문제를 끄집어내면서 한참 동안 열변을 토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타자기는 무얼 씁니까?" 했다. 아직 안 배웠다고 했더니 그래서 안 된다면서 다시 또 한참 열변을 이었다. 공 박사 말이 끝날 것 같지 않아 내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박사님 말씀 모두 옳습니다. 그런데 제가 타자기 안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박사님 기계화 자꾸 말씀하시지만, 기계화만 된다고 사회가 구제되는 것 아니라요. 책방에 가면 책이 산으로 쌓였는데, 저는 이제 글 쓰는 사람들 제발 글 좀 조심해서 적게 썼으면 싶어요. 원고지 한 달에 천 장 쓰던 사람은 백 장 쯤 줄였으면 싶어요. 활자 공해, 인쇄물 공해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저 자신도 이제 글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62-263)

 

1990년 5월 5일 토요일 맑음

.....

아침에 권정생 선생한테 전화를 걸어 풍금을 탈 수 있는가 물어보았다. 악보 보고 가락만 탈 줄 안다고 하면 내가 샀던 것과 같은 악기를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에 언젠가 일직교회 갔을 때 풍금 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락을 대강 탄다면서 그렇잖아도 풍금을 하나 샀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이번 한겨레신문사에서 책이 나오면 내가 가진 것과 같은 것을 하나 사 줘야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혼자 있는 사람은 악기라도 탈 수 있도록 해야 덜 외롭겠다는 생각이 든다. (269)

 

1991년 1월 17일 목요일 맑음

......

중동에 전쟁이 기어코 터졌다는 소식이다. 미국 놈들이 어째서 그곳까지 가서 전쟁을 하나? 참으로 용서 못 할 일이다. 그런데 노태우 정권은 전쟁을 일으킨 것을 축하하면서 군대를 보낸다고 한다. 기가 막힐 일이다. (291)

 

1991년 3월 19일 화요일 맑음

아침에 목욕을 하고 빨래를 했다.

오늘은 21일 한길문학에 가서 강의할 준비로 소설 문장 보기글을 고르고 그것을 옮겨 쓰느라고 온종일 걸렸다.

저녁에 헌책방 앞에 가서 신문을 사고, 오는 길에 찰떡을 2천 원어치 사서, 그중 천 원어치를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애를 먹었다.

밤에는 《백석 시집》을 읽었다. 이 시가 좋은 줄을 이제 새삼 알겠다. 이런 시를 지금의 청소년들도 좀 읽을 수 있어야겠는데, 참 이런 우리 정서가 아주 끊어졌으니 답답하다. 그래도 몇 편쯤 골라서 아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298-299)

 

1991년 5월 5일 일요일 맑음

......

<조선일보>는, 이 김지하 씨의 글 옆에 또 운동권 학생과 인사들을 비판하는 사설과 글을 실어 놓았다. 더러운 신문이다.

김지하란 사람은 이제 그 본질이 드러났다. 이 사람은 본래 노동을 하면서 자라난 사람이 아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어도 그렇다. 이상한 신비주의와 영웅 심리 같은 것이 뒤섞인 성장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이 한때 그처럼 영웅이 된 것은 재주 때문이다. 그가 쓴 시는 삶의 바탕이 없고, 그저 막연한 영웅적 울분과 감정의 배설 뿐이다. 그의 산문은 관념과 추상의 신기루다. 그런 심리들 속에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자신이 괴로워(그렇게 살아갈 도리가 없기에) 이제 고백이니 참회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노동자와 농민과 학생들을 그처럼 악의에 넘친 말로 욕할 것은 뭔가? 역사 속에 매장되어야 할 사람이다.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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