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 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 논형학술총서 24
다시로 가즈이 지음, 정성일 옮김 / 논형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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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각을 대륙으로 보느냐 아니면 해양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특히 일본의 경우 대륙의 관점에서 보면 문명의 최종 수혜자의 위치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해양의 시각으로 보면 가장 앞자리에 위치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시키기 보다는 해양의 첫번째 위치에 붙박아 두려 한다. 그래서 일본은 대마도와 나가사키란 두 지명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다르다. 대마도를 조선이라는 나라로 한정시켜 보려는 반면 나가사키는 세계로 나아가는 입구로 묘사한다. 대마도가 일본의 중세와 근대에 기여한 문화적, 경제적 측면은 무시되지만 나가사키의 폭 60미터에 길이 180미터의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인 데지마出島는 엄청나게 부풀려 소개된다.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의 문물과 중국의 문물을 직접받아들였다고 역사책에 서술한다. 대신 대마도는 나가사키의 그늘에 가려 초라하게 보일 뿐이다. 이렇게 초라한 대마도와 조선의 관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경상도에 위치한 왜관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유일한 해외거점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 외교적으로 고립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는 중국 중심의 당시에 세계 질서로부터 소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인 도쿠가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일본이 해양국가이지만 대륙이라는 정치질서에 의존해야한다는 냉정한 국제관계의 한 단면이었다. 일본은 동북아에서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중국은 명.청의 교체기였기에 일본이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조선을 통해 동북아 질서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交隣의 원칙에 따라 일본과 수교를 재개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선을 일본을 중화의 세계에 편입시키기 위해 교화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시작된 왜관은 단순히 교역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을 통해 일본은 다양한 문화를 흡수해 나갔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조선과 일본의 이런 관계를 의도적으로 대마도와 조선과의 관계로 바라보고 있고 교역 물품 또한 인삼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하지만 조선-왜관-대마도-에도로 이어지는 이 통로는 단순화된 시각으로 단정할 수 없다. 그만큼 이 통로는 일본이 19세기 해양세력으로 재편될 때까지 대륙의 문화를 흡수하는 탯줄과 같은 통로였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이 길을 인삼의 길로 축소하여 보고 있다.

이런 일본의 시각은 근 2백여년 동안 지속하였던 왜관 보다 동남아시아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일본인 집단을 과대포장하여 설명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일본이 이렇게 보는 것은 자신들은 대륙과는 무관한 해양문명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근 2백년 이상 대륙의 끝자락에 일본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왜관은 이런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편향된 것인가를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본이 왜관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이되고 중국이 유럽 열강에 의해 유린 되는 것을 보고 난 뒤의 일이다. 

왜관을 바라보는 시각이 대륙지향적이냐 해양지향적이냐에 따라 다른 무늬를 띠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외교적 주체성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도 왜관은 조선의 외교가 수동적이었는가 능동적이었는가를 판단하는 한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관을 통해서 동북아시아라는 세계를 보면 미국의 저명한 일본사학자인 마리우스 젠슨이 "동북아시아의 중국. 일본. 조선 가운데 가장 폐쇄적인 국가는 조선이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세계는 우리 스스로가 한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韓館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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