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강 레테 - 역사와 문학을 통해 본 망각의 문화사
하랄트 바인리히 지음, 백설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같이 생각했던 책이 한 권 있다. 그것은 치올코프스키의 <성자에서 민중으로-예수의 소설적 변형>이란 책이다. 제목에서처럼 예수라는 인물이 성자의 모습을 벗고 어떻게 민중 속으로 다가오는가를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소설속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사회주의자' '광인' '민중의 동지' 등 여러 변형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변형들은 우리들에게 그 시대의 고뇌와 아픔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다. 그 인간적인 연약함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인간적 약점을 통해 발산되는 예수의 의미는 어쩌면 기적을 행하고 부활한 예수의 이미지보다 더 인간에게 가깝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이 망각에 관한 책 역시 그러하다. 망각이란 어찌보면 가장 무서운 재앙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서운 재앙의 반대편에는 평화스러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망각을 시연하고 있다. 남자들의 경우 '군대 이야기'는 거의 망각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군대에서의 망각은 아주 단순하면서 하찮은 것이다. 계급적 질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꺽여야만 했던 자존심은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말살해 버린다. 그리고 망각의 토대위에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 반복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경험으로 기억시킨다. 하랄트 바인리히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대신 신화와 문학의 망각을 말하고 있다.

사실 신화와 문학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바에는 언제나 그 시대의 환경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신화와 문학의 어떤 귀절은 그 시대를 자각하게하는 통렬한 아픔이 내재되어 있다. 결국 바인리히는 신화와 문학을 통해 우리들의 편협한 망각과 기억을 은근히 조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의도적으로 망각을 행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이런 조소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망각은 어찌보면 아주 편리한 것이다. 이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나 부켄발트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하얀 재灰의 눈'이 마을에 내리는 것을 경험하였다. 주민들은 그 하얀 재가 수용소의 인간들을 화장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무시하였다. 개인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망각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가지고 있던 기억도 함께 망각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의 새로운 기억만을 기억할 것이다.

망각과 기억의 근본은 망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레테의 강은 건너는 사람의 모든 전생을 지워버린다. 그 강을 건넌 사람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기쁨 아니면 고통 뿐이다. 망각은 잊어버린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잊어버림을 감싸는 새로운 기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힌 사람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약이 있다면 감옥은 정말로 말 그대로 지옥일 것이다. 인간이 철창 안에서 밖을 생각하는 것은 철창안을 잊고-망각-과거의 밖을 생각-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잊고 과거를 재생하는 사람과 과거를 잊고 현실을 재생하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망각이다.

망각이란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체계는 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체계인지도 모른다. 이런 개인주의적 망각은 역사에서 정치. 문화 등등 모든 곳에 번져있다. 하지만 망각이 이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출생하기 전에 본 이데아의 세계를 출생하면서 잊어버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잃어버린 이데아의 세계를 기억하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망각된 이데아를 기억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망각이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으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문화란 (...) 죄다 잊어버린 후에도 인간에게 남아있는 어떤 것이다." -하랄트 바인리히, <망각의 강 레테),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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