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푸스 3 : 유대 전쟁사 - 예루살렘 함락사
요세푸스 지음, 김지찬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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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가 살아있을 때 역사란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세인의 합의가 공인하는 민간 유포본vulgata'이었다. 즉 다수의 사람들이 합의에 의해 진실이 승인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우리들이 냉소적으로 말하는 '승자의 역사'와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역사는 '전통이 존재하고 전통은 진실이다'라는 식의 기술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즉 이것은 전통은 항상 권위있는 것이란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인 요세푸스는 이 책의  서문에서 '가장 칭송할 만한 역사가는 후대에 사용되도록 자기 시대의 이야기를 엮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요세푸스는 성공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그의 유대 전쟁사는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주 인용된다는 것과 엄정한 역사서라는 것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요세푸스가 유대 전쟁사를 기술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은인이었던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위한 것이면서 자신을 위한 변명이었다.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갈릴리 지역의 요타파타란 요새를 방어하는 반란군측의 지도자였다. 그는 요타파타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40여일 이상  막아냈던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런 그가 엘리아스 카네티가 언급한 '살아남는 자'의 대열에 끼기 위하여 비열한 술수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물론 유대 전쟁사에서 자신이 살아남은 부분의 이야기는 아주 모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은 자'가 되자 곧바로 변신하였다. 그것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것이란 예언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역사가 돌아가자 그의 발목에 채워졌던 쇠사슬도 제거되었고, 그는 자유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유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변명이 필요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유대전쟁사 7권을 기록하기 위해 유대인의 역사 20권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사실 요세푸스의 27권에 기록된 유대사의 핵심은 7권으로 이루어진 유대 전쟁사이다. 그는 이 7권을 저술하기 위해 20권(이 방대한 책의 내용은 구약과 거의 일치한다)을 저술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배반이 유대인 사회에서 어떻게 비춰질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민족과 유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역사서를 저술했지만 유대인 사회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만큼 그의 저술은 어찌보면 속이 보이는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저술한 유대 전쟁사 7권은 약간의 진실성 문제를 제외한다면 당시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의 유일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유대 전쟁 당시 이스라엘은 수세기 동안 사제 계급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성전 국가였다. 사제들과 이들을 도와주는 토라를 훈련받은 서기관들이 유대 공동체에 율법과 헌법을 제공하는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게다가 이들이 유대 사회의 유일한 지식층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은 방어적이면서 타협적이었지만 반대편의 민중들은 급진적이면서 공격적이었다. 당시 기층 유대 사회에서는 메시아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즉 민중들은 자신들을 고통으로 부터 구해줄 메시아가 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반면 지배 계급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를 무시하였다. 설사 메시아 사상을 지배층이 용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 민중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기존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혁명적인 모습이었던데 반해 지배층의 메시아는 자신들이 만든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개혁의 의미 이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유대 전쟁사는 유대인과 로마와의 전쟁이었지만 유대인끼리의 투쟁이 더 치열했다는 특징이 있다. 사제계급, 열심당인 젤로트, 급진적인 집단과 결합한 민중세력 들간의 투쟁은 마치 현대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의 분열양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간의 다툼이 얼마나 격렬했는가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와중에도 성 안에서는 주도권을 잡기 위한 파벌들간의 대립과 살상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요세푸스는 이들 반란자들을 일괄해서 도적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로마의 질서 속에 자신을 의탁하는 순간부터 짊어져야했던 약점이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로마와의 전쟁을 3년여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민중들이 '혁명적 변화'에 얼마나 열광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혁명은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와 유대인들의 추방이었다. 그리고 유대지방으로 불리우던 이 지역은 팔레스티나라는 새로운 지명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은 로마가 자신들에게 격렬하게 저항한 한 민족에게 내린 가장 가혹한 징벌이었다. 그러면서 로마는 이 지역에 팔레스타인 문제라는 것을 남겨 놓았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는 묘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자가 조국과 민족을 변호하기 위해 역사를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러니는 당시에 진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합의하는 한에 있어 그 역사는 진실이 되는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는 다수이고, 앞으로도 수백년간 진실로 통할 거대한 제국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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