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예술 범우문고 82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 범우사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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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우리들은 다나카를 전중田中이라 부르고, 나카소네를 중증근中曾根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주체적 작명법이었는데, 사람의 이름을 우리 식으로 부르던 방식이었다. 그런 당시 가끔 예술사 분야에서 柳宗悅이란 이름을 발견하였다. 당시 일본인의 이름을 소리가 아니라 글자식으로 부르고, 어떤 때는 소리식으로 부르던 때라 이 사람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모호한 느낌이었다. 성으로 보면 완벽한 한국인이었고, 종열이란 이름 또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에서 어느 분이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며 한국의 미를 집대성한 일본인이란 글을 쓴 것을 보았을 때 혼란은 절정에 달했었다. 柳宗悅과 야나기 무네요시가 같은 사람이란 것을 알게된 것은 얼마 지난 후에 였다.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 체험의 깊이에 따라 다르다. 사실 이방인이 그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예술에 관한 감식안은 대단한 수준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탁월한 점은 당시 우리들이 거의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에서 진정한 조선의 미와 혼을 발견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이런 조선예술에 대한 감각은 후에 일본에서 그의 주도로 시작된 '民藝'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이다.

외국인들은 일본의 문화를 '프리즘의 문화'라고 평가한다. 일단 원형의 빛이 프리즘을 투과하는 순간 굴절되어 분산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화 역시 다른 나라의 문화 원형을 자신들의 프리즘에 투과 시켜 자신들만의 색으로 표현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문화를 바라보면서 그 원형이 어디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프리즘을 투과한 순간 그 문화는 일본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은 자기분야가 아니라 일본의 목공분야에 커다른 영향을 끼쳤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목공예품을 보고 자신은 서양에서는 영국의 목공품을 동양에서는 조선의 목공예품을 꼽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무엇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영국것은 대강 얼버무릴 수 있지만 조선의 목공예품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실 일본의 목공품은 야나기 무네요시 이후로 뚜렷한 일본적 특성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것은 조선의 목공예품을 자신들의 프리즘으로 투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일본은 자기와 목공품으로 이어지는 예술적 시.공성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특징은 헐리웃 영화에서 일본적인 것은 동양적인 것으로 치환시키며 자기와 목공품을 매치시키는 구조로 보여지는 것에서 확인될 수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것과 조선것을 비교하면서 일본이 재료도 좋고 도구도 좋은데 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조선의 것에 더 깊은 영혼의 숨결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를 자탄하고 있다. 즉 규칙성에 대한 비규칙성의 탁월함을 그는 이미 100여년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스피드 시대에 게으름의 찬양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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