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
황런위 지음, 박상이 옮김 / 가지않은길 / 1997년 11월
평점 :
절판


중국 역사에서 명이란 국가는 특이한 색채를 띠고 있다. 명의 건국자인 주원장은 한의 유방과 함께 중국 역사에서 일개 평민의 몸으로 일국의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한의 고조와 명의 태조는 의심이 많았다. 한의 고조가 개국공신의 씨를 말린 것처럼 명의 태조 역시 개국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이렇게 토대를 잡은 의심과 배신의 왕조인 한과 명은 유가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점이 냉소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명의 정치적 특성은 이민족 원의 흔적을 없애고 한족의 고유한 문화를 중흥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황제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서 강력한 군주독제체제를 지향하였다. 이 군주독제체제의 핵심은 고래로부터 황제의 독재권에 대한 관리들의 견제세력이었던 승상제도를 없애고 육부를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황제의 권력. 국가의 부가 충실할 때는 아주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작동하지만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붕괴될때는 작동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명의 중기로 접어들면서 이 시스탬의 틈사이로 환관이란 존재가 스며들게 되었다. 이는 명의 제도하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대신들의 우두머리인 승상제도를 없애고 육부를 황제 직속으로 하게 되면서 황제의 업무가 과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위해 황제는 대신이 아니라 환관을 훈련시켜 업무을 분담시키면서 환관들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들은 대신들의 의견조차 견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즉 명의 정치체제는 황제-환관-대신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형성함으로서 현실적 사안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어렵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거대한 제국에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관리의 수를 충원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명 초에는 8천에 불과하던 관리들의 숫자가 명 말에는 2만에 가까운 수로 증가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2만이 넘는 관리들은 제국의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 아니라 체제를 고수하는 세력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결과 명 제국은 중기를 넘어서면서 동맥경화증의 증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황제와 대신들 사이에 어떤 교감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떤 개혁적인 정책도 입안될 수 없었다. 황제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신들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대신들 역시 황제의 재가를 얻어야만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이런 시스템은 무엇을 하게하는 것보다는 견제하는 것에 더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유교정치의 원래 목적인 덕을 바탕으로한 정치를 실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명제국은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한대 이래 중국에서 시도하였던 유교에 기반을 둔 정치질서가 완벽하게 자리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관리의 충원은 일정한 시기에 치러지는 과거를 통해 충원되었고, 서구의 발전속도보다는 분명히 느리지만 완만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다만 이런 요소들이 명의 세계관과 대외관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명이 추구한 정치시스템의 한계였는지 모른다.

1587년 정말로 아무일도 없었던 해는 황제와 대신과 인민들 모두가 그 무력한 시스템 속에 안주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오만한 중화사상 속에 안주함으로서 명은 서서히 "종이 호랑이"로 퇴색해가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