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 신화상징총서 4
세르주 위탱 지음, 황준성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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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시즘gnosism은 보통 靈智主義로 알려져 있다. 영지주의는 초세기부터 교회의 견제를 받았다. 이는 교회가 로마제국의 통치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인식되어 박해를 받은 것과 유사한 과정을 보이고 있어서 무척 흥미롭다. 교회가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아 국가종교로 변모하고 결국 자신이 또 하나의 제국이 되면서 영지주의는 엄청난 탄압을 받게된다. 영지주의의 주장이 교회를 위협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현대인들이 영지주의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신비주의와는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교회는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인 십자가의 성 요한, 빙겐의 힐데가르트, 아빌라의 데레사와 같은 수도자들의 사상은 교회의 영성적 측면에서 인정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신비주의와 영지주의는 차이가 있는 것일까. 신비주의는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상호보완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믿기 위해서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말처럼 신앙과 이성은 독립적이기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식은 이성과 신앙을 초월한 무한히 우월한 완전한 인식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수많은 개별종교들의 근원이되는 최초의 본원적 지혜와 연결이 되는데 이는 종교에서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자들은 신의 영역 대신 인식을 그 자리에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입장으로 볼 때 종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지주의와 영지주의자들은 교회의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영지주의자들이 견지하는 태도는 언뜻보면 기독교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아니 서로 겹쳐지는 부분이 상당하다. 특히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육체는 감옥이고 영혼은 그 감옥에 갇힌 것이란 주장은 중세적 기독교 신앙관과 아주 흡사한 모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지상의 세계에 구원의 시간표가 존재하는데 반해 영지주의자들은 지상에 이런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영지주의에서는 순환을 주장한다. 이 순환은 불교의 윤회와 비슷한 것으로 다른 점은 불교가 윤회를 통해 해탈의 과정으로 간다면 영지주의는 단순한 순환의 반복만을 거듭할 뿐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 입문한 사람들은 그로부터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위치는 어떻게 규정해야하는가. 여기서 영지주의자들은 철저한 이분법으로 세계를 구분한다.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구분하여 자신들은 빛의 세계에 다른 사람들은 어둠의 세계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 빛과 어둠의 세계는 인간 세상의 낮과 어둠 처럼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단절되어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 입문하는 순간 그의 구원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서는 기독교에서와 같은 구원자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자신들이 속한 그 단체가 구원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의식을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하는 특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모임을 아가페라고 주장하고 아가페에 참여하는 사랍들 모두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있다는 기독교적 사고방식과는 아주 상이한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은밀한 자신들만의 비밀집회를 가져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 비밀의 전례를 전수받기 위해서는 집단의 소수에 들어가야만 한다. 이들 소수는 집단을 이끌어가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세속의 사람들과 구분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윤리에 집착한다. 이들은 성에 대하여 철저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이는 영지주의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초세기 기독교는 이 위험한 유혹으로부터 아주 극적으로 벗어남으로서 영지주의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은 독신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보고 있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적인 결합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자웅동체의 이야기는 이들이 육체적 결합에 대한 해결책으로 신화의 세계로 회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종말이 오면 구원받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 구분한다. 이는 기독교가 회개에 기반을 둔 구원과는 아주 차별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의 이런 요소들은 당연히 기독교와의 충돌을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정밀한 이론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정한 신학적. 철학적 교육을 받은 학자들 뿐이었다.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영지주의나 기독교나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영지주의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지주의와의 차이점을 교회가 언급하면 할수록 일반인들은 혼동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이 둘 사이의 접점이 모호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결국 교회는 이런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교리의 확립과 신앙의 근간을 정리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해야만 했고, 여기서 그동안 비교적 자유로웠던 신앙의 전제들을 문자로 고정시키게 되었다. 이 결과 문자로 고정된 신앙의 신조와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는 사상은 이단으로 몰아 철저하게 박멸하였다. 그리하여 영지주의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영지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에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체에 대한 통일성이었다. 이 통일성은 그때까지 그 어떤 종교도 실현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였다. 하지만 교회는 그 댓가로 인간의 이성 속에 자리잡고 있던 무한한 상상력을 상실하였는지도 모른다. 도그마에 갇힌 종교는 어찌보면 새로운 영지주의일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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