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빈의 일요일
조르주 뒤비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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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저서 <프랑스사>에서 부빈전투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1214년 부빈Bouvines에서 그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신기한 일이었으나 2만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보병대의 지원을 받아 반동적인 봉건부대와 외국침략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가 카페 왕조의 왕권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 승리는 자신들의 통일을 의식하게 된 한 국가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온 프랑스인의 환호와 환영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이 존엄왕 필립Philippe Auguste으로 부르는 필립 2세가 즉위한 12세기 후반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2류왕가의 대접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잉글랜드의 플란타지네트 왕가의 앙쥬제국과 독일제국 사이에  위치한 필립 2세의 가장 큰 문제는 앙쥬가와의 대결이었다. 자신의 신하이면서 자신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지고 있던 헨리 2세와의 장기간에 걸친 투쟁은 곧 카페 왕가의 존립문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솔직히 역사학자들은 플란타지네트 왕가의 헨리 2세와 토마스 베케트의 대립, 아들인 리차드와의 대립, 그리고 리차드와 동생인 존과의 대립만 없었다면 잉글랜드의 프랑스 정복은 시간문제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특히 필립 2세는 사자왕 리차드가 사망한 뒤 앙쥬 제국의 통치를 이어간 실지왕 존의 시대에 봉건적인 주종관계를 이용한 법률관계를 이용하여 존으로부터 노르망디, 메인, 앙쥬, 뚜렌, 포아투의 영지를 몰수할 수 있었다. 이 결과 프랑스는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부빈의 전투 이전에 이미 이 지역을 필립 2세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존왕으로부터 몰수한 순간 프랑스가 탄생했다고 믿고 있다. 부빈의 전투는 그 사실을 확인한 하나의 절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인들이 부빈의 전투에 열광하는 것은 국가의 재탄생이란 역사적 사실에 하나의 상징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부빈의 전투는 평범한 전투가 아니라 신의 의지와 프랑스의 영광이 합치된 전쟁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당시 필립 2세에 대적했던 잉글랜드 왕 존, 신성로마황제 오토, 플랑드르 백작 페르난두, 블로뉴 백작 르노의 연합군은 교회와 부르조아의 지지를 받고있던 필립 2세와 격돌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프랑스의 승리가 확정되었고, 이 소식이 프랑스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일주일간 주야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고, 교회는 프랑스 전역에서 감사의 미사를 드렸다. 왕도 자신에게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에게마저 대사면령을 내릴 정도로 이 승리의 파장은 컸다. 역사가들은 이 승리로 인해 프랑스는 왕가의 왕국에서 <국민공동체>라는 개념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중세 시대에 전투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신에게 봉헌된 일요일은 전쟁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교회의 제재도 각오해야만 했다. 그러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이런 규정은 종종 무시되었다. 부빈의 전투가 일요일에 일어난 것은 카페 왕가와 침략군의 구도를 신앙의 수호로 변형시키는 계기로 작용되었다. 프랑스는 후일 로마 교황청에 의해 <교회의 딸>이란 칭호를 얻을 만큼 로마 가톨릭의 중요한 지지세력이었다. 즉 카페 왕가는 신앙의 수호자로 침략자는 파괴자로 묘사됨으로서 부빈의 전투가 단순히 체제 수호가 아니라 신앙을 수호하는 성전임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 맥락은 프랑스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부빈의 전투가 새롭게 부각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부빈은 역사적 사실에서 프랑스의 단결이 요구될 때 마다 새롭게 각색되어 등장하는 하나의 신화적 구호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동일한 사실이 시간을 두고 반복되면서 어떻게 변형되어 신화로 되어가는 가를  조르주 뒤비는 책 뒤에 관계 사료를 첨가함으로서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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