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된 대지
애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광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라틴 아메리카의 절개된 혈관>이란 제목의 이 책은 콜롬버스의 발견 이후 남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기록이다. 백인들이 신대륙이라고 자의적으로 이름붙인 이 땅은 태초부터 존재해있던 땅이었고, 그곳의 주인은 콜롬버스가 인디안이라고 이름붙인 원주민들이었다.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은 손님이 아니라  정복자로 들어와 아무 거리낌없이 새로운 땅을 점유하였다.  백인들의 자의적인 규칙에 따라  이 땅의 주인들은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하였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자신들의 부를 이루어줄 도구로 취급하였다.  가혹한 착취와 학대에 견디지 못한  원주민들은 서서히 <인종적 자살>의 방법을 택하며 멸종되어 갔다. 노동력의 급격한 감소를 대신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노동력을 데려오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이 결과 원주민들은 확실하게 소수자의 위치로 떨어지면서 라틴아메리카는 풍요하지만 뿌리가 없는 공허한 땅으로 전락하고 만다. 원주민의 문화와 문명이 뿌리채 파헤쳐진 이 공허한 대지 위에 정복자 백인들의 문화가 이식되고, 흑인들의 문화가 혼합되면서 원주민의 문화는 히미한 기억속에 존재하는 유물로 남게 된다. 찰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남미를 여행했을 때 그가 본 원주민의 상황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갈레아노는 이 책에서 수탈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수탈이란 경제적인 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백인들의 수탈은 원주민들의 고유의 정신까지도 사라지게함으로서 인종 전체를 노예화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남아메리카의 비극은 스페인 콩키스타도레들의 이런 저급함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천박한 종교관과 이기적 경제관, 그리고 가혹한 정치관은 남아메리카가 질곡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출발선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선교사들의 인식 또한 문제였다. 이들은 원주민들의 참상을 보면서도 이에 관여하기 보다는 백인 지배층의 교화를 통해서 야만적인 원주민 통치를 완화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의 소극적이고 권력에 타협적인 태도는 결국 70년대 <해방신학>이 터져나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은 스스로와 제도에게 <그렇게 해서 바뀐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콜롬버스가 도착한 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책은 이런 과정속에서 서술된 아픔의 역사인 것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혈관이란 인간이고, 자연이며, 남아메리카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체가 유럽의 제국주의의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기 위해 어떻게 유린당했는가를 이 책은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갈레아노가 고발하는 이 모든 것은  과거와 현재의 일회성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착취 속에서 과연 이 거대한 땅에 희망이 있을까. 그러나 그 고통의 땅에서도 유럽인들에 의해 절개된 대지의 혈관이 남아메리카 민중들의 노력으로 서서히 봉합되어 가고 있음을 볼 때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땅은 진정한 <발파라이소-파라다이스의 입구란 뜻>와  <엘도라도-황금의 땅>가 될 것이다.  그날을 위해 전진!!!

*교황 바오로 3세는 1537년 인디오가 <진정한 인간>이라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교황의 이 교서에 납득하지 않는 신학자와 사상가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들은 인디오가 신앙을 받아들이기에는 인간의 서열 가운데 너무 낮은 곳에 있다고 보았다.

1957년 파라과이의 최고 재판소는 자국의 재판관 전원에게  <인디오는 우리 공화국에 거주하는 다른 주민과 똑같은 인간이다...>라는 회람을 돌렸다. 참고로 파라과이는 영화 미션의 무대가 되었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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