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 독일인과 일본인의 전쟁 기억
이안 부루마 지음, 정용환 옮김 / 한겨레출판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1970년 12월 7일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추모 기념비 앞. 한 사나이가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 세계의 모든 신문들과 방송들은 그의 이 모습을 보도하였다. 그 사람의 이름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였다. 그가 무릎을 꿇음으로서 독일을 위험스럽게 바라보던 세계 모든 국가들은 독일의 진심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이 극적인 제스처가 1990년 독일 통일의 보증서가 되었다.

2001년 8월 13일 오후 4시,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기습적으로 일본의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여 참배하였다. 그는 <내 신념을 설명하면 우리 국민과 근린제국의 여러분도 이해해 줄 것>이란 담화를 발표하면서 일본이 패전 56년이 되어가는 현재까지 전쟁에 대한 진솔한 반성이 없다는 점을 세계 각국에 떳떳하게 공개하였다.

히로시마는 반전의 상징이 되었다. 해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이면 히로시마 돔에서 평화의 대제전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평화의 실상은 언제든지 흩어질 구름 위에 세운 허구의 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평화의 대제전을 담당하는 당사지들이 아직도 자신들의 과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전쟁을 끝내려 한 미국의 행위는 악이 되고 아시아 각국의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자들은 희생자가 되어야 하는가. 역사의 곡해는 이정도면 더이상 역사가 직필이어야 한다는 공자의 말씀은 무색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만행은 일본의 경제력에 의해 점차 희석되어 가는 현실은 서글프기만 하다.

라는 구호가 적힌 아유슈비츠 수용소의 정문. 노동이 우리를 자유롭게한다구? 하기사 중세의 수도사들은 <일하고 기도하라Ora et Labor>는 정신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에게 일은 기도였고, 기도는 일이였다. 즉 기도와 삶은 일체를 이루는 동일한 조건이었던 셈이다. 아우슈비츠에는 기도 대신 자유가 있었다. 강제적으로 규정되는 노동과 죽음이라는 자유가... 독일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지위확보를 위한 희생양으로 아직까지도 악역의 위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반성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아시아에서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대리자의 위치로 격상되면서 과거의 죄과에 대한 면죄부를 발급받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가 말해주는 진실은 간단하다. 멍청하게 반성한자는 아직도 영화나 책을 통해 악인으로 남아있지만, 파렴치하게 반성을 하지 않는 자들은 믿음직한 동반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가 상징하는 진실의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진실임을 느껴야만 한다. 그 허상의 상징 히로시마는 알랭 르네의 <내사랑 히로시마>의 이미지가 창출하는 절망의 시간속에 일본의 모든 죄악이 희석되어서는 안된다. 반면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현대 이스라엘의 폭력적 국가의 성립에 정당성을 부여해서도 안된다.

독일인과 일본인들에게 이차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은 <영과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동서 양쪽에서 세계의 절반을 점령했던 두 나라의 국민들은 자신의 적들이 하나씩 무릎을 꿇을 때마다 만세를 부르고 기념품을 받으며 일본인 혹은 독일인으로 태어난 것에 자부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한순간의 영광은 그들이 패전을 하였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영광의 기억인 것이다. 이들이 이 추억을 지워버리고 우리의 진정한 이웃으로 다가오는 날은 언제일까? 기억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시기는 전쟁세대의 마지막 인간이 사라질 때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기억은 영원히 역사의 서판속에 새겨져 유전되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는 영원히 오해의 기억속에 상존하면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할지도 모른다. 바로 이점이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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