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토마스 이디노풀로스 지음, 이동진 옮김 / 그린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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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특이한 도시이다.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면서 가톨릭과 동방정교에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 부활한 종교의 잉태지이다. 그런가하면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의 도움으로 알라의 계시를 받기 위해 천국으로 여행을 떠났던 성스러운 장소이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를 성서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한다. 다윗이 주춧돌을 놓고 성을 쌓은 이후 이 도시는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고향이 되어 버렸다. 이에 대하여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여기서 2천년 이상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들은 다윗의 이야기를 침략자의 이야기로 비하한다. 기독교도들은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과 맺은 조약에 근거해서 이 도시를 양보할 수 없다고 버틴다. 이들의 근거가 제일 미약하지지만 예수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마치 한 가문의 진정한 상속자는 하나인데 3명의 후계자가 나타난 자신이 적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역사적 DNA를  검사하면 누가 진정한 후계자로 판명날까?


중동의 문제가 복잡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늦게 이곳에 진출한 서구의 정략적인 태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은 이제는 문제도 될 수 없는 상식이다. 그 이전까지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서로 공존하는 자세로 땅을 공유해왔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유럽에서 포그롬-유대인 박해-이 강화되자 일단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시도하면서 이런 공존의 관계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서구세계는 이 지역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의 대리인이 되어주어야할 국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유대국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서구제국은 예루살렘의 문제는 공동통치라는 발상으로 살짝 비껴나갔던 것이다. 즉 예루살렘은 어느 누구의 소유가 될 수없다는 원칙을 제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67년 6일전쟁 이후 예루살렘이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통치영역에 편입되자 세계는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이스라엘에 귀속되는 것을 반대하지만 정치적인 경우에는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이중적인 서구의 태도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영구적인 자국의 수도로 확정하였을때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때 서구제국이 한일은 자국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 그대로 존치시키는 것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석유문제나 테러 문제가 불거지면 아랍세계를 맹공하는 이중적인 잣대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도 도시는 언제나 장중하게 자신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다. 도시는 결코 편협하지 않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자는 적이든 친구이든 모두 포용한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도시에게 왜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지 않느냐고 불평을 한다. 도시는 다윗이 시온성에 주춧돌을 놓았을 때 부터 지금까지 오고 갔던 인간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어떤 인간들은 살며시 들어왔다  요란하게 떠나기도 했고, 어떤 방문자는 무뢰하게 왔다가 건방지게 떠나기도 했다. 도시는 이들 인간들이 자신의 품안에서 평화롭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도시에게 종교. 민족. 사상은 무의미한 관념일 뿐이다. 도시는 떠들석한 시장의 삶, 각 종파의 기도소리를 모두 사랑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귀가 막히고 눈이 먼 광신자들 뿐이다. 그들에게는 도시도 분명한 소속이 있어야 된다고 느껴지는지...


예루살렘의 문제는 이미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유엔은 결의안242호를 통해 이스라엘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하도록 권고한 바가 있다. 이 결정으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자국의 수도로 삼은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란 사실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중동지역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군사력 우위에 따른 힘의 균형학상 이 권고안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반면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가 훼손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해 적당한 선에서 눈을 감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 이래 예루살렘이란 도시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의 손에 장악되지만 않는다면 지금의 상태로도 만족할 듯이 보인다. 예루살렘에 대해서 최대의 피해자는 일찍부터 이곳에 삶의 터전을 누리고 있던 이슬람교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보금자리를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체결된 모든 조약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이 누리는 지위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과 이미 예전에 맺은 계약을 통해 그 지위를 인정받았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8년 이후에 발생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성은 분명히 이슬람의 주장에 수긍하지만 국제 정치의 현실은 이스라엘의 강제합병에 무게를 더 실어주고 있는 현재, 예루살렘의 문제는 결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져버리고 말았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이 진정으로 도시의 이름을 되찾으려면 협상 이전에 상대에 대한 믿음이 선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예루살렘을 세계인들의 양해 아래  이차세계대전 당시 첵코의 리디체에서 독일군이 저질렀던 방식대로  완전히 파괴하고 지도에서 지명을 말살하면 해결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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