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행군
장 클로드 갈, 장 피에르 디오네 외 글 그림 / 문학동네 / 1998년 5월
평점 :
절판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주장에 찬성표를 던진다. 아주 오래전 10원에 24권의 만화를 볼 수 있던 시절, 만화는 어떤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체였다. 그리고 60년대 후반 일본의 학습만화가 홍수처럼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때 만화로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80년대 대만작가 채지충의 고전만화를 보았을 때 이제 만화가 표현할 수 없는 분야가 없구나란 생각을 했다. 90년대, 몇몇 출판사들이 일본에 치우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며 유럽의 만화를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도 이전에 죽음의 행군과 같은 만화가 있었다. 이른바 '만화 소설'이라는 장르였다.  그 대가는 '박기당'선생이었다. 그러나 만화와 장문의 글이 조합된 만화는 그리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 만화는 예전에 보았던 박기당 선생의 작품과는 반대로 그림이 많이 있고 글이 적은 만화였다. 그림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피곤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윌리를 찾아라'에서 얼마나 많은 윌리를 찾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이 만화 속에서 상징적인 그림을 찾는다는 것은 극히 어렵고 생소한 작업일 수 있다. 이 만화에서 문제는 질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읽는 독자는 이런 것을 좋아하고 저런 것을 싫어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대성당의 비밀에서 대주교가 완성된 성당의 제단에서 성작을 들어올리는 장면이 있다. 가톨릭의 미사에서 성작을 거양한다는 것은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성변화하는 신비의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주교는 그 신비를 자신의 영광으로 대치하고 있다. 그 오만의 결과는 성당의 무너짐이다.  신이 우리에게 위에서 밑으로 내려주는 것은 은총뿐만이 아니라 중력도 있다. 중력, 그것은 신의 징벌이 아닐까. 하나 더, 정복자의 군대에서 대장의 천막에 걸려있는 휘장은 마치 알렉산더 대왕의 태양깃발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 만화의 작가는 알렉산더의 정복이라는 과업보다는 그가 그 정복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안겨준 고통의 심판을 그리려 했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만화의 세계는 아주 적은 부분이다. 그 적은 부분을 통해 여러가지를 맛보려한다는 자체가 욕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제공한 출판사의 노력은 보답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는 여러가지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까....

끝으로 아론의 복수 마지막 장면에서 라스켈이 군중 사이에서 죽은 아론의 모습을 보는 장면은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엄 윌레스가 죽음의 순간에 애인의 모습이 군중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 만화는 언뜻 영화를 찰영하기 위해 먼저 그려본 그림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는 그림속의 퍼즐을 찾는 게임과 같다. 그 게임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 만화를 선택하는 것은 취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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