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의 역사
쟝 뤽 엔니그 지음 / 동심원 / 1996년 2월
평점 :
품절


엉덩이에도 역사가 있었나? 이 책의 제목을 보며 맨 처음 떠오른 단어였다. 앞표지에는 들라크루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란 그림에서 따온 질감이 풍성한 엉덩이가 그려져 있는 이 책은 제목처럼 둔중한 느낌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저자는 성의 역사를 엉덩이라는 질물을 통해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엉덩이의 역사>에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의 포르노물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사고를 일정하게 지배하는 성적관념에 대해 자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 고찰과정에서 엉덩이는 신체의 한 부분, 즉 허리와 다리 사이에 위치한 구조학적 위치에서 성의 왜곡과 성의 본질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변모한다.  그 과정은 에로티시즘의 변질의 역사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문학적 낭만성과 결합할 때 긍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것이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할 때는 엄청난 파괴적인 실체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예로 포르노소설을 들 수가 있다. 포르노 소설은 문학의 한 부분으로 정식적인 대접을 받은 적은 없다. 몇 몇의 작가-아나니스 닌, 오스카 와일드, 헨리 밀러, 존 파울즈, 블라디미르 나브코프-가 성을 주제로 글을 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적인 것이란 인증을 받아야만 했다. 그 외의 포르노는 언제나 비주류로서 지하세계를 통해 유통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장르의 소설이 사라진 적은 없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바라보는 엉덩이가 전자의 경우라면 남성들이 상상하는 엉덩이는 언제나 후자의 개념이 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주류가 누구냐에 따라 그 대상의 정의가 확립된다는 점에서 엉덩이는 여전히 신체의 일부로서보다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즉물로 기능하고 있다.

내가 <장 뤽 엔니그>라는 작가의 엉덩이의 역사를 서슴없이 집어들었던 것은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라는 작가의 <궁둥이:새엄마에 대한 찬가>라는 책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었다.  요사는 이 책에서 <말하고, 또 말하거늘 그것은 궁둥이다. 둔부도, 엉덩이도, 히프도, 뒷부분도 아닌 궁둥이다. 왜냐하면 그녀 위에 올라탈 때 내게 전해지는 감동이 온순하면서도 예민하고,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부드러운 암말 위에 있을 때의 짜릿함과 똑같으니 말이다.> 라고 리디아의 왕 깐다울레스가 신하들에게 자신의 왕비 루끄레시아의 궁둥이를 자랑하는 것처럼 궁둥이를 찬미한다. 이때 느꼈던 남아메리카 페루의 상상력은 지금도 유쾌하게 다가온다. 그 궁둥이의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은 자연히 <궁둥이의 역사>로 이어졌고 <에로스와 가스테리아>란 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궁둥이와 성, 음식과 성이란 주제를 재미있게 섭렵했다. 궁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거리가 창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궁둥이는 위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궁둥이다. 둔부도, 엉덩이도, 히프도, 뒷부분도 아닌 궁둥이다. 각각의 반구체는 육체의 낙원이다. 팔 한아름만한 크기의 그것은 추운 밤에는 따뜻하게 몸을 녹여주며, 머리를 휴식하기 위한 편안한 베개이며, 사랑의 행위를 할 때는 기쁨의 샘이다>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 새엄마에 대한 찬가>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