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불멸의 아름다움 - 고딕 대성당으로 보는 유럽의 문화사
사카이 다케시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고딕, 불멸의 아름다움은 좀 약오른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의 중세학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갖게하는 책이기도 하다. 사실 고딕 건축물은 그동안 설계도나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우리들이 쉽게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앙리 포시옹의 "로마네스크와 고딕"이란 책은 그 부피만으로도 고딕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의 기를 꺽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은 고딕을 유럽의 시원인 '숲'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유럽의 숲'은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숲은 생명의 이미지이면서 창조의 장소이고 불멸이 재생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숲이 중세 유럽에 들어서면서 인구가 팽창하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파괴된다. 이것은 유럽의 탄생에 중요한 역활을 한 숲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고딕이 등장하였다고 하면서, 고딕과 숲을 연결시킨다. 그 기발함은 고딕의 외양에서 느꼈던 기묘함의 의문을 해소시킨다. 그리고 그 숲의 역사는 중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지속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셀로나의 그 유명한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은 중세인들의 숲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과 사랑을 현재에 구현한 것이라는 주장은 가우디의 건축에서 느껴지던 그 기괴함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를 느끼게 한다.  

고딕은 일견 복잡하게 느껴진다. 뽀쪽한 첨탑이 무수히 배치된 고딕의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또 다른 바벨탑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불경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신을 향한 인간의 무한한 동경을 표현한 것으로도 이해한다. 이렇게 고딕은 신성함과 불경함을 느끼게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이 모순점을 저자는 거룩한 성스러움과 잔인한 성스러움으로 가볍게 해결하고 있다. 즉 우리들이 여성의 상징으로 성모 마리아를 거론할 때 신을 낳으신 거룩한 여인으로 이해한다. 반면 힌두교의 칼리 여신은 수 많은 인간 제물을 통해 새로운 창조-파괴를 통한 창조-를 이룩한다. 즉 창조라는 같은 주제를 한쪽은 밝은 면으로 다른 쪽은 어두운 면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고딕의 다양한 모습이 이와 같다는 점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증명하고 주장한다.  

사실 중세는 세상의 다양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의 빛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단일한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다양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교차한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통해 중세를 규정하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은 고딕에도 그래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깊은 숲, 그곳은 어둠과 온화함이 있는가 하면 히미한 한 줄기 빛과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숲은 끊임없이 생명을 재생해 낸다. 씨앗이 떨어지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고, 떨어져 썩고, 다시 싹이 나고...하는 무한 창조의 반복이 일어난다. 고딕 성당안에서도 매일 숲의 이런 생명창조가 반복된다. 미사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반복된다.  

고딕 성당에서 반복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이미지는 교회의 두 가지 표상이다. 부활의 기쁨이 앞에 오느냐, 수난의 고통이 앞에 오느냐에 따라 교회의 모습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은 숲이 생명의 모습과 죽음의 모습-드루이드교의 의식을 보라-을 간직한것과 무엇이 다른가. 숲은 인간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줄 때 생명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숲이 깊은 심연의 공포로 다가올 때 고통이 되는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의 이야기에서 숲의 이미지는 밝음이 아니라 검은 색이다. 이런 이중적 모습이 고딕의 성당 안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히미한 빛은 죄인에게는 두려움의 어둠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삶의 혹은 재생의 빛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의 자유로움-로빈 훗에서 나타나는 자유-은 고딕에 의해 규격화되면서 통제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고딕은 제도속으로 들어가면서 권위로 변질된다.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라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고딕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한 고딕에는 삶의 약동이 아니라 제도의 견고함만이 남게된다. 이렇게 고딕에 대한 자유로움이 규격화되는 과정에서 중세 유럽은 숲을 경외의 대상에서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세유럽은 다양성과 창의성을 희생하고 단일성과 규격화를 달성한다. 이러한 반발은 루터의 반발로 이어지지만 숲에 대한 중세적 사고는 고딕에 의해 그대로 보전된다. 즉 중세 유럽인들은 고딕을 통해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그 세상을 인간의 삶에 맞게 개발하는 것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유럽인들의 생각은 결국 제국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고딕, 그 불멸의 아름다움은 어찌보면 유럽인들만의 시각인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움이 불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피와 땀이 그 거대한 고딕의 숲에 스며들었을까? 그 불멸의 아름다움은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검은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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