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 독일국민과 히틀러의 공모, 집단적 애국주의의 광기에 대한 르포르타주
라파엘 젤리히만 지음, 박정희.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이 세상에서 가장 치밀한 민족인 독일인들이 어떻게 한낱 선동꾼인 사람에게 넘어가 고통의 나락속으로 떨어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선택했고, 믿었으며 제국의 황혼때까지 그를 숭배하였다. 왜 그들은 그렇게 하였을까? 독일은 언제나 유럽 세계의 변방이었다. 허울뿐인 제1제국-하이네는 이 제국을 구름 위에 세워진 제국으로 묘사했다-과 프랑스를 꺽고 통일된 제2제국은 1차세계대전으로 몰락하였다. 아마도 독일인들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유럽 세계가 자신들이 성장하고 주도적인 국가로 변모하는 것을 시기하여 베르사이유라는 족쇄로 얽어매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독일의 감성은 베르사이유에 반대하는 것은 무조건 선이고 이것에 동조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하였다. 즉 베르사이유를 강요한 서구 민주주의 세력은 악이고 이를 거부하는 독일인은 선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이마르 체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번졌고, 결국 히틀러가 나치즘으로 대두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왜 이성의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독일인들이 이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 독일의 심성을 가장 크게 보여주는 것은 바그너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바그너의 음악은 몇몇의 단편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지루하다. 그 엄청난 양의 악보 속에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짧은 강렬함이다. 하지만 그 짧은 강렬함에 빠져들면 바그너의 세계는 신화의 세계가 되고 이 세계는 독일이 된다. 신화와 이성은 결코 양립하지 않는다. 르네 지라르는 신화의 세계는 은폐된 거짓의 세계라고 보았다. 즉 지라르는 신화 속의 영웅담은 약탈과 살인과 범죄를 교묘하게 은폐한 기록이라고 보았다. 즉 신화의 세계를 뒤집어 보면 그 실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독일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바그너가 숭상한 신화의 세계 역시 그러하다는 점이다. 그 신화 속에 미화되어 있는 폭력과 살인의 미학은 독일이 본받아야 할 세계가 아니라 이성으로 제압해야만 했던 세계였다. 하지만 언제나 신화는 이성을 압도하였고, 그 신화의 세계가 독일의 자존심으로 비약하면서 독일의 비극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반면 이성으로 언제나 반박받는 성서의 세계는 신화가 아니라 진실의 세계로 본다. 여기에는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 있다. 그것은 고통이며 자기 비하이다. 이런 세계는 독일인의 세계가 아니라 그들이 박해한 열등한 민족의 세계였던 것이다. 독일은 자신들이 이성의 민족으로 이해되기를 바라면서 감성의 세계에 살았다. 윤리의 세계에 살고자 하였지만 범죄의 신화속에 침잠하였다.

사실 독일의 역사에서 이성이 지배했던 시기가 얼마나 되었던가? 독일이 역사에서 일어서던 시기에는 항상 이성보다 감성이 지배하였다. 합리성은 언제나 독일을 분열시켰을 뿐 통합에는 신화와 감성이 작용하였다. 언제나 신화와 감성은 이성을 뛰어 넘었다. 그 깊숙한 시원에는 열등감이 있었다는 점이다. 게르만이라는 단어는 로마라는 거대함 속에서 언제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런 열등감은 게르만의 신화를 극대화시켰고 그것을 통해 독일의 자존심과 아니 자부심으로 승화시켰다. 그 조야한 신화가 이성을 뛰어넘는 실재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무엇을 해 주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국민으로서의 책임감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역사 속에서 독일이 차지할 위치와 역할을 말했을 뿐이다. 이런 히틀러의 이야기에 많은 독일인들은 암묵적으로 지지를 표하였다. 즉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신화적 전망을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그 미래가 파괴의 신이 지배하는 세계일지라도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이 지지한 세계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아니 신화가 지배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신화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가 추구하는 영웅의 세계가 도래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의 새로운 신화를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찾았다. 그것은 아주 절묘한 것이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제1차세계대전의 패배는 독일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배신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즉 '등 뒤의 칼'이라는 희생양 찾기 이론이 횡행하였던 것이다. 이런 불확실한 세계속에서 히틀러는 서서히 솟아오르게 되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은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히로시마와 같은 의미였다. 전쟁의 가해자에서 어느 새 피해자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독일이라는 거대한 힘을 주변국들이 갈기갈기 찟어 놓은 것으로 이해하였고, 히틀러 역시 이러한 신화를 독일인들에게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베르사이유 조약을 하나 하나 파기해 나가는 그 과정이 독일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고, 결국 독일이라는 새로운 천년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으로 독일인들이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업을 히틀러가 이루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독일인들이 생각하고 있던그 모든 것을 히틀러가 이루어 주었다고 믿음으로서 그들은 히틀러의 추종자에서 협력자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감히 상상속에서만 생각한 것을 실재로 이루어준 사람에 대한 그들의 보답이었다.

이 책과 병행하여 르네 지라르의 책을 다시 읽어 보고 있다. <희생양>과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인데 여기서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읽으며 독일인과 히틀러를 생각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히틀러는 스스로 독일 민족을 구원하는 예수를 자처했지만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목숨도 보전할 수 없는 나약한 헤로데였고, 사악한 유다였다는 점이다. 독일인들은 예수가 혁명적인 왕이 아니라 희생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자살한 유다처럼 또는 세례자 요한의 목이 쟁반에 담겨온 것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못했던 헤로데처럼 히틀러가 독일의 영광이 아니라 파멸을 가져온 베르세르크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같이 죽는 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성이 아니라 신화가 지배한 세계의 비극이었고 독일의 멍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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