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리안의 유럽 침략
존 배그넬 베리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존 베리교수의 "바바리안의 유럽침략"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중국의 위진남북조사를 연구하는 박한제교수의 이론이었다. 박한제교수는 장강 이북과 장강 이남의 중국화를 "호한체제론"과 "교구체제론"으로 설명한다. 원래 한족의 중심지가 장강과 황하의 사이인 중원이고, 황하 이북은 유목민족이 장강 이남은 남만의 거주지였다. 그런데 중국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황하 이북에서는 중국인과 오랑캐-순전히 중국의 관점-와 융합되었다는 것이고, 장강 이남에서는 오호에 의해 서진이 남진하면서 그곳의 토박이-舊-와 이주한족-僑-사이에 교류를 통해 중국화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 이론의 장점은 중화문명의 전파가 한족 주도의 일방적이 아니라 서로 상호보완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고, 남방의 고유한 문화와 북방의 한족문화와 중원문화의 이질적인 요소를 설명하는데도 아주 적합한 이론이라 하겠다. 

존 베리 교수 이 책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제격이라 하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호한/교구체제의 성립시기와 로마의 바바리안에 의한 잠식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 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들은 가끔 역사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예를들면 중세시기를 450년경부터 1300년까지로 잡는다고 할때 430년경과 1310년경은 중세가 아니고 어떤 시대일까하는 의문에 접한다. 이런 오류가 게르만족의 이동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우리들은 아시아에서 한족에 의한 흉노의 압박으로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이동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일순간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4세기에 시작되어 근 9세기까지 진행된 역사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게르만족이라고 할 때 독일이라는 이미지와 너무 근접하게 연상하기 때문에 그 지역의 광대함을 쉽게 망각한다. 현재의 우크라이나지역에서 시작된 게르만족의 이동은 고트족-동고트와 서고트가 있다-이 움직이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이들이 로마의 변경을 침략하면서 로마와 충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고트족은 훈족이 이들을 압박하기 이전부터 로마의 변경에서 로마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거주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로마에로의 침입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이런 침략과 격퇴의 반복과정이 침략으로 돌변한 것은 앞에서 말한 훈족의 침입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때부터 로마는 고트족과 훈족의 침입과 그 여파에 따른 수많은 부족들의 이동에 의해 국경선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 결과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를 서고트족은 에스파냐를 롬바르드족은 북이탈리아를 프랑크족은 갈리아를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를 앵글색슨족은 브리타니아를 각각 점유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점유과정에서 로마는 완전히 퇴패하여 물러갔으라?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 정복자들은 로마의 법과 질서를 필요로 했고 행정을 필요로 하였다. 이들이 과연 로마의 문명까지 필요로 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이 과정에서 로마인들과 바바리안들은 필요에 의해 이원적인 체제를 구성하면서 공존하게 된다. 로마인들은 로마법을 바바리안들은 자신들의 법-역사의 기록에는 살리족의 법전이 자주 언급된다-을 적용하면서 분리하되 융합되어 있는 체제를 구성한다.

바바리안 정복자들은 여전히 동쪽 로마제국인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의 임명장을 원했고, 동쪽의 황제는 자신의 권위가 침해되지 않는 범위에서 이들 바바리안들에게 직위를 수여하였다. 이런 기묘한 동거관계는 자연스럽게 서로마제국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들은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476년에 접수된 사실을 로마제죽의 멸망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실제로 동쪽의 로마는 1천년 가량 더 지속된다. 서로마의 멸망은 로마제국의 멸망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서쪽에 대한 통제권의 약화라는 점일 뿐이다. 서쪽은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에게는 자신들 영토의 일부였다. 그래서 그곳에서 명멸하던 수많은 군소왕국들은 여전히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대의 견제를 받거나 혹은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볼 때 게르만족의 이동에 의해 서쪽지역은 야만화가 촉진되면서 로마문명이 소멸되었다는 급진적인 이론은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서쪽 로마의 게르만화과정은 야만인들의 학습효과에 의해 그들은 문명을 배워가는 과정이었고, 로마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본질이 게르만의 본질과 뒤섞이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로마의 게르만화 과정은 이탈리아 지역의 가톨릭 수도자들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들 수도사들에 의해 북쪽의 야만인들이 그리스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로마적 요소-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게르만적 요소와 타협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게르만적인 요소는 로마적인 것을 받아들이거나 흡수되었던 것이다. 존 베리 교수는 이런 과정을 로마와 게르만의 "연방구성체"라는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어느 한쪽이 지배의 핵심이 아니라 로마와 게르만이 느슨하게 연합하여 이원적인 법체계 속에서 공존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중세의 봉건제도는 이런 "연방구성체"의 과정에서 생겨난 혼혈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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