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에게 살해된 왕 - 프랑스 상징의 기원이 된 불명예스러운 죽음
미셸 파스투로 지음, 주나미 옮김 / 오롯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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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유럽에서는 중요한 일이 2가지 발생하였다. 하나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영국 점령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군 운동이었다. 이것에 가려져 앞으로 세계사에 큰 발자국을 남길 계급이 프랑스에서 나타나는 것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계급은 성벽bourg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이란 뜻의 부르조아bourgeois이다.

몸이 뚱뚱해서 비만왕이라 불린 루이 6세는 호색과 식도락에 탐닉한 왕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먹는 것 때문에 죽을 것'이란 비아냥대로 56세의 나이에 비만이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는 27세의 나이에 부왕 필리프 1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29년간의 제위에 있으면서 루이 6세는 대수도원장 쉬제의 도움을 받아 국왕 직할 도시와 주교 관할 도시 간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고 왕권이 지방 권력보다 우위를 차지하도록 노력하였다.

루이 6세의 이런 노력은 프랑스 왕국을 안정되게 하였으며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또한 순탄하였다. 게다가 두 번의 결혼으로 3명의 딸과 7명의 아들을 얻어 왕국의 후사 또한 걱정이 없었다. 루이 6세는 장남인 필리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 왕국을 통치하게 하려 하였다. 카페 왕가 초기에는 왕권이 취약하여 부친이 왕이 되면 후계자를 왕으로 임명하여 공동통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관습은 거의 2백 년 가까이 계승되다 필리프 2세 때 사라졌다. 루이 6세 또한 이런 관례에 따라 장남 필리프를 4살의 나이에 '예정된 왕'으로 삼고 9년 뒤에 랭스에서 정식으로 대관을 함으로써 젊은 왕 필리프로 알려지게 된다.

젊은 왕 필리프의 이름은 루이 6세의 부친 필리프 1세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젊은 왕 필리프의 할아버지인 필리프 1세는 모친이 키에프 공국의 안나였다. 키에프의 안나는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필리프라고 지었는데 이는 사도 필립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필리포스 2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런 동방식 이름은 카페 왕가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그 전까지는 로베르, 앙리, 외드, 위그, 라울과 같은 이름이 주를 이루었다. 

루이6세는 이렇게 동방의 영웅의 이름을 가진 자신의 부친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려 하였다. 수도원장이자 왕의 고문이었던 쉬제 역시 새로운 젊은 왕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젊은 왕 필리프는 15살이 되던 해에 사냥터에서 돌아오다 불의의 사고-민가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돼지 때문에 말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필리프가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예정된 왕위후보자의 죽음은 루이 6세와 쉬제가 공들여 왔던 왕위 계승에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젊은 왕 필리프가 죽지 않았다면 그의 동생인 루이가 왕위를 물려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연대기에 보면 젊은 왕 필리프의 동생인 루이-후일 루이7-는 부친과 쉬제의 도움으로 성직에 입문하기로 되어 있었고 성직자의 재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런 루이는 수도원에서 성직자의 길을 걷다가 형인 젊은 왕 필리프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가 되었던 것이다. 수도승 지망생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고 하자 프랑스 백성들과 귀족들은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왕위 계승자가 된 루이는 부친의 뜻에 따라 아퀴텐의 알리에노르와 결혼을 하여 프랑스의 영토를 배로 늘리는데 기여하지만 수도자같은 루이의 성향은 여장부였던 알리에노르와 맞지 않았다. 결국 루이와 알리에노르의 이혼은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에 큰 분쟁의 씨앗을 남겨놓게 된다.

문제는 왕위 계승이 아니라 필리프의 죽음이었다. 백성들은 필리프가 하찮은 돼지에 의해 죽었다는 점을 불길하게 생각하였다. 젊은 왕의 죽음은 귀족의 가치에 맞지 않은 불명예스런 죽음이었던 것이다. 전쟁도 아니고 사냥터도 아닌 백주에 길가에서 뛰쳐나온 돼지에게 죽었다는 것은 신의 징벌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 백성들의 심적 동요는 왕조의 미래에도 불길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프랑스의 역사는 불행한 일이 계속 발생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프랑스는 강력한 상징과 화려한 대관식을 통해 분위기 반전을 꾀하였다. 불운하게 죽은 필리프가 신의 징벌이었다면 그것을 상쇄할 새로운 종교적 상징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였다. 테오토코스-하느님의 모친-인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통해 왕국을 보호해 달라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왕실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흰 백합을 차용하여 왕실 문장을 만들고, 천상의 색이면서 성모님의 상징색인 파란색을 자신들의 왕실색으로 삼았다. 이런 왕국의 노력은 플뢰르 드 리스Fleur-de-lis’로 구현되고 프랑스 왕국은 성모에게 봉헌되어 교회의 맏딸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중앙집권 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아마도 프랑스는 역사적 위기를 상징을 통해 극복한 예일 것이다. 이런 역사의 반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나치의 침공으로 위기에 봉착했을 때 스탈린은 자신이 부정했던 교회와 성자들과 대지의 어머니 러시아라는 공식을 통해 극복한 것의 선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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