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현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직접 해봐야 아는거야.
머리로만 생각해 결론을 내버리는 녀석은 결국 그 정도의 인간밖에 될 수 없어.
나는 살아 있는 한 계속 도전하겠어...p502

                                       "최근에 벚나무를 본 적이 있어?" 내가 불쑥 물었다.
"아뇨" 그녀의 목소리가 내 몸에 진동으로 전해져,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그런거야. 꽃이 떨어진 벚나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기껏해야 나뭇잎이 파란 5월까지야.
 하지만 그 뒤에도 벚나무는 살아있어.
 지금도 짙은 녹색의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
 그리고 이제 얼마 후엔 단풍이 들지."
"단풍이요?"
"그래, 다들 벚나무도 단풍이 든다는 걸 모르고 있어"-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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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벛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던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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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슬럼독 밀리어네어’-마음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입력 2009-03-12 09:52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인도 뭄바이의 빈민가에서 성장한 소년 자말(데브 파텔)은 거액의 상금이 걸려 있는 TV 퀴즈쇼에 출연한다.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직업도 변변찮은 자말이 승승장구하면서 최종 단계에까지 이르자 경찰은 그를 사기죄로 의심한다. 어떻게 정답을 다 알게 되었는지를 캐묻는 경찰에게 자말은 이제껏 직접 겪어왔던 일들이 실마리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한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8개 부문을 수상한 화제작 ‘슬럼독 밀리어네어’(3월19일 개봉)에 대한 인도인들의 불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확실히 이 영화는 ‘빈곤’을 ‘풍경’으로 만든다. 소년들이 질주할 때의 역동적인 카메라와 인상적인 화면색조와 현란한 편집은 스쳐 지나가는 쓰레기더미조차 스펙터클로 만든다. 카메라가 순식간에 까마득히 멀어지면서 빈민가의 빼곡하게 이어 붙은 허름한 지붕들을 (멀리 위에서 내려찍으면서 장면 사이에 불연속적인 단절을 만들어 보여주는 방법인) 부감의 롱쇼트 점프컷으로 스케치할 때, 가장 궁핍한 광경은 서정적이고 이국적인 볼거리가 된다.

인도에 심각한 빈곤이 실재한다는 것과 그 빈곤을 볼거리로 현시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영화 속 참혹한 생활 환경에 대한 묘사들은 종종 ‘진짜 인도의 모습’과 ‘진짜 인도의 모습이라고 외부인들이 여기고 싶어하는 모습’ 사이에서 의문을 갖게 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현실에 엄존하는 사회문제를 성찰하게 하는 대신, 적당히 마음 아파하면서 편안히 구경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니 보일이 감독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만듦새가 상당히 뛰어나다는 사실까지 부정하긴 어렵다. 소재에 대한 태도와 형식에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시티 오브 갓’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의 스타일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다. 다양한 구도를 구사하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세 가지 줄기의 이야기를 능란하게 짜올리는 플롯, 복잡한 상황을 긴장감 넘치게 간추려내는 편집은 과시적이기도 하고 탁월하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품의 음악은 영화음악에 허용된 최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착상부터가 흥미진진하다. 퀴즈 문제를 통해 서사에 고리를 만들어서 에피소드와 능숙하게 잇는 화술은 이야기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를 유감 없이 충족시킨다. 삶의 난관을 온 몸으로 헤쳐온 소년이 바로 그 험난한 과거 때문에 달콤한 열매를 맛본다는 점, 현재의 상금을 챙기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그 다음 단계의 문제로 계속 도전하는 퀴즈쇼의 과정이 불굴의 의지로 돌파해나가는 삶의 자세를 상징한다는 점 등 관객들이 휴먼 드라마에서 기대하는 모티브들이 효율적으로 기능한다.

기본적으로 멋진 스토리였지만 거칠고 방만했던 원작 소설을 장르 영화의 틀 속으로 다듬어 넣은 각색도 솜씨가 있다. (영화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바꾸었다. 소설 속에선 친구였던 캐릭터를 형으로 바꾸었고, 주변 인물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주인공에게 집중시켰다. 퀴즈쇼에 등장하는 질문들의 경우,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온 문제는 단 하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중에서 성격과 직업까지, 여성 캐릭터가 완전히 다르다. 영화는 성장소설인 원작을 멜로로 바꾸어냈다.)

그렇다. 좋은 이야기였다. 번쩍이는 연출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영화였다. 최근 들어서 본 가장 화려하고 신나는 엔딩 타이틀 시퀀스까지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마음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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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도쿄 소나타'-신음하는 정적


기사입력 2009-03-20 09:54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화면이 점차 밝아진다.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면 식탁에 올려놓은 신문지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나뒹굴고, 소파 앞 테이블에 펼쳐놓은 잡지가 파라락 넘어간다. 방에서 허겁지겁 뛰어나온 여자가 미닫이 유리문을 닫은 뒤 마루에 들이친 빗물을 열심히 닦아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추고 다시 유리문을 연 후에 쏟아지는 폭우를 우두커니 쳐다보는 여인. 그 고적한 풍경 속에서 실루엣이 된 채로.

‘도쿄 소나타’의 첫 장면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명확히 요약하면서 이후 펼쳐질 내용 전체에 기나긴 메아리를 남긴다. 쓸쓸하면서 불안한 정서를 빼어난 표현력으로 체화한 이 오프닝 시퀀스는 단 두 개의 쇼트만으로 관객의 마음 깊숙이 성큼 걸어 들어온다. 아찔할 정도로 탁월한 시작이다.

직장에서 해고된 류헤이(가가와 데루유키)는 아내 메구미(고이즈미 교코)와 자식들에게 실직 사실을 숨기고 거리로 출근을 계속한다. 미군 부대에 입대하려는 장남 다카시(고야나기 유)와 피아노를 배우려는 차남 겐지(이노와키 가이)가 아버지 류헤이와 부딪치면서 가족간의 갈등은 점차 극심해진다.

‘도쿄 소나타’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첫 가족 영화인 것은 아니다. 10년 전에도 그는 ‘인간합격’을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큐어’ ‘회로’ 같은 걸작 호러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섰던 공포영화 거장의 이 신작은 새로운 접근 방식과 색다른 표현 방법으로 그의 오랜 팬들을 놀라게 한다.

사실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들의 완성도에는 편차가 있다. 그가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해온 공포-스릴러 장르에서도 ‘도플갱어’나 ‘로프트’ 같은 태작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공포-스릴러 장르의 바깥에서 만든 ‘밝은 미래’ ‘거대한 환영’ ‘인간합격’ 같은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인상적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는 구로사와 기요시가 지난 20여년 동안의 일본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작품이다.

초반에 이 영화는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일과를 보내며 노동하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어느 날 갑자기 열외된 어느 가장의 황망한 심리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외국으로부터 온 값싼 노동력이 기존 인력을 대체하는 경제 문제, 교사가 더 이상 학생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교육 문제,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해외에 병력을 파병하는 군사-외교 문제 등 현대 일본 사회가 겪고 있는 다층적 맥락들이 직설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실직 사실을 감추고 있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아이들 역시 자신의 가장 큰 고민거리를 혼자 속으로만 삭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류헤이 가정 곳곳에 균열을 만든다. 사실 이 가족은 가장이 실직하기 훨씬 전부터 서서히 내파(內破)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심각한 위기를 겪는 이 가족은 그대로 일본 전체의 축도가 된다. (이때 가가와 데루유키와 고이즈미 교코 같은 베테랑들의 뛰어난 연기 못지 않게 인상적인 것은 ‘아무도 모른다’의 야기라 유야를 떠올리게 하는 아역 배우 이노와키 가이의 슬픈 얼굴이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은 정적 속에서 발생한다. (사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랬다. ‘큐어’의 카메라가 침묵 속에서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섬뜩함을 떠올려보시라.) 특히 ‘도쿄 소나타’는 밝은 조명 아래서 가족들이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4인용 식탁이 얼마나 두려운 공간인지를 생생히 묘사한다. 젓가락을 들기 전의 묵언 상태에서 서로 눈길을 피할 때나, 밥을 먹다가 잠시 멈춰서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 비극은 어느새 인물들의 어깨에 내려 앉는다. 가족영화의 성패는 상당 부분 밥 먹는 장면에 좌우된다. 7번에 달하는 이 영화의 식사 장면들은 그 자체로 갈등과 위기에서 희망까지를 선명하게 응축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 전까지의 사실적이고 세밀한 전개 방식과 완전히 궤를 달리 한다. 집을 나간 가족들이 겪는 파국을 묘사하는 클라이맥스는 사실 지나치게 극적이고 또 인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들의 후반부는 가끔씩 매우 과격하거나 너무 멀리 간다. 그러나 그의 영화세계를 특징 짓는 것이 바로 그 후반부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장남 다카시가 전장에서 돌아오는 꿈 장면 이후에 펼쳐지는 내용들은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부분은 이상할 정도로 종교적이다. (독법에 따라서는 후반부 전체를 꿈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들 속에서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하다. 거기엔 ‘내가 아닌 나’와 ‘나를 넘어선 나’와 ‘통제할 수 없는 나’가 있다.)

그리고 엔딩 시퀀스가 펼쳐진다. 누군가 연주를 끝내고, 누군가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누군가 말없이 지켜본다. 세 가족이 이제 막 걸어 나온 공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모두가 한 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곳엔 침묵만이 교교히 감돈다. 정적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하는 공간이 사라지면, 발자국 소리만을 동반한 채 어둠 속에서 엔딩 크레딧이 뚜벅뚜벅 걸어 올라온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어떻게 관객의 가슴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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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랜 토리노’-이스트우드가 미리 쓴 유서


기사입력 2009-03-09 16:28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이 글에는 결말에 대한 부분적인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결코 마주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나. 그게 바로 나야.” 이게 일흔여덟살의 할아버지가 내뱉을 대사는 아닐 것이다. 설혹 내뱉는다고 해도 그 말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둔중하고 빡빡한 위협의 뉘앙스를 체화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런 발언을 하는 노인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스트우드가 만든 영화에서 ‘배우 이스트우드’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은 각별한 기쁨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 이후 4년, ‘그랜 토리노’가 우선 반가운 것은 그가 연출뿐만 아니라 주연까지 맡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배우로서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 될지도 모를 이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분명 기대했음에도 막상 보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카리스마로 시종 압도한다. 지친 듯 낮게 갈라진 쉰 목소리에 거부할 수 없는 위엄과 힘을 담은 그는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그대로 괴팍하고 단호한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였다. 40여년 전 서슬 퍼렇게 매그넘 44를 겨누던 해리 캘러핸(‘더티 해리’)은 세상에 몸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늙었다.

 

아내와 사별한 뒤 혼자 사는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자동차 회사에 다닐 때 생산했던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애지중지한다. 갱단의 협박에 못 이긴 이웃집 소년 타오(비 뱅)는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 월트에게 들키자 달아난다. 차 훔치기에 실패한 타오를 갱단이 강제로 끌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집 마당으로 들어오자 지켜보던 월트가 총을 겨눠 그들을 쫓아낸다.

월트 코왈스키는 늘 불만에 가득 찬 고집불통 노친네다. (심지어 가족을 포함해서) 타인들에 대해 문을 닫아 건 채 자신만의 공간에 틀어박힌 그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몰상식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걸핏하면 총을 집어드는 다혈질이기까지 하다. (아마도 코왈스키란 이름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무지막지한 마초 주인공 스탠리 코왈스키에서 따왔을 것이다.)

하지만 연쇄적인 이야기 사슬의 끝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결국 복수보다는 근심, 응징보다는 책임, 원칙보다는 관용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모든 것이 변하게 된 ‘늙은 더티 해리’의 이야기니까.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과 돈 시겔의 형사영화를 거치면서 폭력적인 반영웅의 대명사가 되어온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그랜 토리노’는 그의 1992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 못지 않게 자기반영적이다. 어떤 관객은 팔십을 바라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서 희대의 ‘노인 액션 히어로’ 모습을 보고 싶어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를 채우고 있는 것은 폭력의 순간에 대한 휘황한 매혹이 아니라 폭력의 대가에 대한 뼈 아픈 성찰이다.

‘그랜 토리노’는 쉬운 폭력으로 서사를 해결하지 않는다. 여기서 반성은 결국 희생이라는 좀더 큰 주제와 조우한다. 이 영화의 희생이 지극히 인상적인 것은 어느 결함 많은 인간이 오랜 죄책감의 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나선 결과였기 때문이고, 자각된 휴머니즘이 편협한 애국심을 끝내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신(神)의 무결한 희생이 아니라, 이제 막 생겨난 책임감에서 끝내 눈 돌리지 못하는 인간의 처연한 희생이다. 인간의 희생은 자신의 본성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관객에 따라선 백인인 월트와 아시아인인 타오의 관계에 대한 묘사에서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타오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편을 들었다가 70년대 이후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던 소수민족 몽족 출신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이었던 구식 인간이 변해가는 이야기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모두 철저하게 실패한 전쟁인 베트남전으로 시계바늘을 거꾸로 되돌려 바로잡고 싶어하는 미국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사실에 대해 월트가 후회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그 소망의 근저에 흐르는 것은 무엇보다 반성이다.

‘그랜 토리노’가 미국에서 흥행 수입 1억 달러를 훌쩍 넘기면서 크게 히트한 데에는 뛰어난 유머 감각이 적잖은 기여를 한 듯 하다. 상이한 문화권의 접촉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해와 이해에 대한 탄력있는 유머들이 이 영화의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샘솟는다. 서로 다른 민족과 인종끼리 주고받는 독설과 욕설들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그 모든 말들과 상황이 결국 반인종주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몽족 사람들의 이름을 멋대로 바꾸어 부르던 월트 역시 병원에서 다른 인종인 간호사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리는 경험을 하는 장면이 들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이스트우드는 작품의 본뜻이 오인되지 않도록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으며 세심하게 안배했다.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이 영화는 결국 장엄해진다. 말하자면 ‘그랜 토리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미리 영화로 써두는 유서 같다. 먼 훗날, 아니 어쩌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기에 지레 안타까워지는 미래의 어떤 날, 나는 우리 곁을 떠나간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위대한 감독에 대한 부고(訃告)를 ‘그랜 토리노’ 이야기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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