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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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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9 13:03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 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서
이렇게 나를 놓아주지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L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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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9 12:58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했다
결벽증,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나 친구 집에는
발걸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싫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다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일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며
지레 지쳐서 명줄이 줄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덤하여
가진 것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외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만하다
그러나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니 것을 나는 안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 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지 않은가
L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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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9 00:33
통영 항구의 동춘 끝을 지나고
해명 나루 지나고
작은 통통배
용화산 뒤편을 휘돌아 가니
첫개라는 어촌이 있었다
인가가 몇 채나 되는지 희미해진 기억
푸른 보석 같은 물빛만은
지금도 눈에 어린다
친지 집에서는 내가 왔다고
큰 가마솥 그득히 홍합을 삶아 내어
둘러 앉아서 까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던 홍합
그때처럼 맛있는 홍합은
이후 먹어 본 적이 없다
내 나이 열두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손님은
큰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잠은 작은 집에서 잤는데
아제씨는 어장에 가고 없었다
호리낭창한 미인 형의 아지매는
병색이 짙어 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 안에 불이 밝혀지고
발자욱 소리도 들려왔다
덩달아 파도 소리도 들려왔다
알고 보니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
날이 밝고 보다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폐결핵인 아지매의 약으로
고양이 새끼의 탯줄이 필요했고
아지매는 고양이를 달래고 달래어
탯줄을 얻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이냐고도 했다
첫개라는 어촌의 하룻밤
홍합과 아지매와 고양이
얼마 후 나는
아제씨가 상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L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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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9 00:23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 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 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횡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L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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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2 12:07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벛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던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