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화면이 점차 밝아진다.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면 식탁에 올려놓은 신문지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나뒹굴고, 소파 앞 테이블에 펼쳐놓은 잡지가 파라락 넘어간다. 방에서 허겁지겁 뛰어나온 여자가 미닫이 유리문을 닫은 뒤 마루에 들이친 빗물을 열심히 닦아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추고 다시 유리문을 연 후에 쏟아지는 폭우를 우두커니 쳐다보는 여인. 그 고적한 풍경 속에서 실루엣이 된 채로.
‘도쿄 소나타’의 첫 장면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명확히 요약하면서 이후 펼쳐질 내용 전체에 기나긴 메아리를 남긴다. 쓸쓸하면서 불안한 정서를 빼어난 표현력으로 체화한 이 오프닝 시퀀스는 단 두 개의 쇼트만으로 관객의 마음 깊숙이 성큼 걸어 들어온다. 아찔할 정도로 탁월한 시작이다.
직장에서 해고된 류헤이(가가와 데루유키)는 아내 메구미(고이즈미 교코)와 자식들에게 실직 사실을 숨기고 거리로 출근을 계속한다. 미군 부대에 입대하려는 장남 다카시(고야나기 유)와 피아노를 배우려는 차남 겐지(이노와키 가이)가 아버지 류헤이와 부딪치면서 가족간의 갈등은 점차 극심해진다.
‘도쿄 소나타’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첫 가족 영화인 것은 아니다. 10년 전에도 그는 ‘인간합격’을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큐어’ ‘회로’ 같은 걸작 호러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섰던 공포영화 거장의 이 신작은 새로운 접근 방식과 색다른 표현 방법으로 그의 오랜 팬들을 놀라게 한다.
사실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들의 완성도에는 편차가 있다. 그가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해온 공포-스릴러 장르에서도 ‘도플갱어’나 ‘로프트’ 같은 태작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공포-스릴러 장르의 바깥에서 만든 ‘밝은 미래’ ‘거대한 환영’ ‘인간합격’ 같은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인상적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는 구로사와 기요시가 지난 20여년 동안의 일본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작품이다.
초반에 이 영화는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일과를 보내며 노동하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어느 날 갑자기 열외된 어느 가장의 황망한 심리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외국으로부터 온 값싼 노동력이 기존 인력을 대체하는 경제 문제, 교사가 더 이상 학생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교육 문제,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해외에 병력을 파병하는 군사-외교 문제 등 현대 일본 사회가 겪고 있는 다층적 맥락들이 직설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실직 사실을 감추고 있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아이들 역시 자신의 가장 큰 고민거리를 혼자 속으로만 삭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류헤이 가정 곳곳에 균열을 만든다. 사실 이 가족은 가장이 실직하기 훨씬 전부터 서서히 내파(內破)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심각한 위기를 겪는 이 가족은 그대로 일본 전체의 축도가 된다. (이때 가가와 데루유키와 고이즈미 교코 같은 베테랑들의 뛰어난 연기 못지 않게 인상적인 것은 ‘아무도 모른다’의 야기라 유야를 떠올리게 하는 아역 배우 이노와키 가이의 슬픈 얼굴이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은 정적 속에서 발생한다. (사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랬다. ‘큐어’의 카메라가 침묵 속에서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섬뜩함을 떠올려보시라.) 특히 ‘도쿄 소나타’는 밝은 조명 아래서 가족들이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4인용 식탁이 얼마나 두려운 공간인지를 생생히 묘사한다. 젓가락을 들기 전의 묵언 상태에서 서로 눈길을 피할 때나, 밥을 먹다가 잠시 멈춰서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 비극은 어느새 인물들의 어깨에 내려 앉는다. 가족영화의 성패는 상당 부분 밥 먹는 장면에 좌우된다. 7번에 달하는 이 영화의 식사 장면들은 그 자체로 갈등과 위기에서 희망까지를 선명하게 응축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 전까지의 사실적이고 세밀한 전개 방식과 완전히 궤를 달리 한다. 집을 나간 가족들이 겪는 파국을 묘사하는 클라이맥스는 사실 지나치게 극적이고 또 인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들의 후반부는 가끔씩 매우 과격하거나 너무 멀리 간다. 그러나 그의 영화세계를 특징 짓는 것이 바로 그 후반부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장남 다카시가 전장에서 돌아오는 꿈 장면 이후에 펼쳐지는 내용들은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부분은 이상할 정도로 종교적이다. (독법에 따라서는 후반부 전체를 꿈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들 속에서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하다. 거기엔 ‘내가 아닌 나’와 ‘나를 넘어선 나’와 ‘통제할 수 없는 나’가 있다.)
그리고 엔딩 시퀀스가 펼쳐진다. 누군가 연주를 끝내고, 누군가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누군가 말없이 지켜본다. 세 가족이 이제 막 걸어 나온 공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모두가 한 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곳엔 침묵만이 교교히 감돈다. 정적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하는 공간이 사라지면, 발자국 소리만을 동반한 채 어둠 속에서 엔딩 크레딧이 뚜벅뚜벅 걸어 올라온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어떻게 관객의 가슴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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