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랜 토리노’-이스트우드가 미리 쓴 유서


기사입력 2009-03-09 16:28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이 글에는 결말에 대한 부분적인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결코 마주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나. 그게 바로 나야.” 이게 일흔여덟살의 할아버지가 내뱉을 대사는 아닐 것이다. 설혹 내뱉는다고 해도 그 말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둔중하고 빡빡한 위협의 뉘앙스를 체화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런 발언을 하는 노인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스트우드가 만든 영화에서 ‘배우 이스트우드’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은 각별한 기쁨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 이후 4년, ‘그랜 토리노’가 우선 반가운 것은 그가 연출뿐만 아니라 주연까지 맡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배우로서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 될지도 모를 이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분명 기대했음에도 막상 보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카리스마로 시종 압도한다. 지친 듯 낮게 갈라진 쉰 목소리에 거부할 수 없는 위엄과 힘을 담은 그는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그대로 괴팍하고 단호한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였다. 40여년 전 서슬 퍼렇게 매그넘 44를 겨누던 해리 캘러핸(‘더티 해리’)은 세상에 몸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늙었다.

 

아내와 사별한 뒤 혼자 사는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자동차 회사에 다닐 때 생산했던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애지중지한다. 갱단의 협박에 못 이긴 이웃집 소년 타오(비 뱅)는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 월트에게 들키자 달아난다. 차 훔치기에 실패한 타오를 갱단이 강제로 끌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집 마당으로 들어오자 지켜보던 월트가 총을 겨눠 그들을 쫓아낸다.

월트 코왈스키는 늘 불만에 가득 찬 고집불통 노친네다. (심지어 가족을 포함해서) 타인들에 대해 문을 닫아 건 채 자신만의 공간에 틀어박힌 그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몰상식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걸핏하면 총을 집어드는 다혈질이기까지 하다. (아마도 코왈스키란 이름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무지막지한 마초 주인공 스탠리 코왈스키에서 따왔을 것이다.)

하지만 연쇄적인 이야기 사슬의 끝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결국 복수보다는 근심, 응징보다는 책임, 원칙보다는 관용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모든 것이 변하게 된 ‘늙은 더티 해리’의 이야기니까.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과 돈 시겔의 형사영화를 거치면서 폭력적인 반영웅의 대명사가 되어온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그랜 토리노’는 그의 1992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 못지 않게 자기반영적이다. 어떤 관객은 팔십을 바라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서 희대의 ‘노인 액션 히어로’ 모습을 보고 싶어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를 채우고 있는 것은 폭력의 순간에 대한 휘황한 매혹이 아니라 폭력의 대가에 대한 뼈 아픈 성찰이다.

‘그랜 토리노’는 쉬운 폭력으로 서사를 해결하지 않는다. 여기서 반성은 결국 희생이라는 좀더 큰 주제와 조우한다. 이 영화의 희생이 지극히 인상적인 것은 어느 결함 많은 인간이 오랜 죄책감의 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나선 결과였기 때문이고, 자각된 휴머니즘이 편협한 애국심을 끝내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신(神)의 무결한 희생이 아니라, 이제 막 생겨난 책임감에서 끝내 눈 돌리지 못하는 인간의 처연한 희생이다. 인간의 희생은 자신의 본성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관객에 따라선 백인인 월트와 아시아인인 타오의 관계에 대한 묘사에서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타오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편을 들었다가 70년대 이후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던 소수민족 몽족 출신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이었던 구식 인간이 변해가는 이야기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모두 철저하게 실패한 전쟁인 베트남전으로 시계바늘을 거꾸로 되돌려 바로잡고 싶어하는 미국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사실에 대해 월트가 후회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그 소망의 근저에 흐르는 것은 무엇보다 반성이다.

‘그랜 토리노’가 미국에서 흥행 수입 1억 달러를 훌쩍 넘기면서 크게 히트한 데에는 뛰어난 유머 감각이 적잖은 기여를 한 듯 하다. 상이한 문화권의 접촉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해와 이해에 대한 탄력있는 유머들이 이 영화의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샘솟는다. 서로 다른 민족과 인종끼리 주고받는 독설과 욕설들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그 모든 말들과 상황이 결국 반인종주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몽족 사람들의 이름을 멋대로 바꾸어 부르던 월트 역시 병원에서 다른 인종인 간호사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리는 경험을 하는 장면이 들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이스트우드는 작품의 본뜻이 오인되지 않도록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으며 세심하게 안배했다.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이 영화는 결국 장엄해진다. 말하자면 ‘그랜 토리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미리 영화로 써두는 유서 같다. 먼 훗날, 아니 어쩌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기에 지레 안타까워지는 미래의 어떤 날, 나는 우리 곁을 떠나간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위대한 감독에 대한 부고(訃告)를 ‘그랜 토리노’ 이야기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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