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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올드 데이스 - 휴먼 다큐멘터리 1
박규원 지음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한 인간의 드라마틱한 삶보다 흥미로운 것이 또 있을까. 더구나 그가 전쟁과 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살아갔던 인물이라면 말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1930년대의 상하이는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혼융되면서 엮어낸 ‘상하이의 황금시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상하이 올드데이스’는 이 황금시대의 절정기에 영화황제로 등극했던 한국인 김염의 삶을 조명하는 매력적인 책이다. 일제의 침략과 국공 내전·문화대혁명 등 격동기의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간 그의 생애는 서사시적이다.
한국에서 한 가족의 생애는 단순한 가족사에 그치지 않는다. 40대의 한국인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조부모는 식민지 치하의 삶을 살아야 했고, 부모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고 빈곤의 50, 60년대를 거쳐 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족 3대의 운명은 곧 한국 현대사 자체이기도 하다. ‘상하이 올드데이스’의 저자와 주인공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김염은 독립운동가의 아들이고 그의 가족은 일제 침략과 국공 내전, 6·25와 분단의 와중에서 미국과 중국·북한과 남한에 뿔뿔이 흩어졌다. 평범한 40대 주부인 저자 박규원은 자신의 작은 할아버지인 김염의 삶을 통해 그들 가족과 역사 속 인간의 운명에 대해 되묻고 있다.
주인공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으로 서양의학 교육을 받은 첫세대 양의사다. 그는 ‘105인 사건’에 연루돼 중국으로 망명,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조선인 이상촌 건설을 위해 힘썼던 인물이다. 아버지 김필순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자 가족들은 중국 전역으로 떠돌게 되고, 둘째 아들 김염은 가난 속에서 영화배우의 꿈을 키우게 된다. 1929년 쑨유 감독에 의해 발탁되어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롼링위와 함께 출연한 ‘야초한화’로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됐다. 이후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해 중국의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아리랑’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저널리스트 님 웨일스는 “나는 김염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들인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김염은 매력적인 배우이기도 했지만, 당대의 배우들과 달리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도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피하지는 못했다. 최고의 영화배우에서 기계수리공으로 전락했고, 위수술이 잘못되어 죽기 전 20년 동안 산송장으로 지내는 비극을 맞아야 했다. 그의 삶은 극도의 궁핍과 화려한 성공, 정치적 성공과 좌절 사이를 오가는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이 책은 8년간의 성실한 답사와 취재로 복원된 ‘논픽션’이지만, 저자는 김염의 입을 빌린 1인칭 소설 형식을 취해 극적 효과를 꾀하고 있다. 김염의 생애가 주는 감동도 크지만, 그의 삶을 복원하려는 저자의 의지와 노력도 눈물겹다. 간혹 비치는 혈연 사이의 끈끈한 애정고백은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고, 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을 다룬 책들이 경박한 처세학과 공허한 성공기에 그치고 있는 요즘, 역사적 인간의 묵직한 생애를 다룬 이 책의 가치는 빼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