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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오로스 - 지식, 권력, 민중은 함께 갈 수 있는가? 파레오로스의 지혜로 답하다
임문영 지음 / 학고재 / 2025년 3월
평점 :
경세제민(經世濟民)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경제’(經濟)라는 말이 비롯된 사자성어다. 경제를 뜻하는 영어의 ‘Economy’에는 희소한 자원으로 최대의 생산을 만들어내는 ‘효율성’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지만, 경세제민에는 그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사전적 의미인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풀이부터가 그러하다. 이코노미에는 ’세상을 다스린다‘거나 ’백성을 구제한다‘라는 어감과 뉘앙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경제학이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논리와 철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담 스미스 이후의 경제학은 본래적 가치에서 멀어진 듯한 인상이다. 미래전환 대표인 임문영이 펴낸 <파레오로스>는 일종의 ’경세제민‘을 위한 저자의 대담한 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PC통신 하이텔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AI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디지털 전환의 현장에서 30여년 이상을 일해왔다. 디지털과 인터넷 현장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인식했으며, 그러한 변화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도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으니 디지털 세계는 원래 그의 전공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현장 경험을 토대로 <디지털 세상이 진화하는 방식>, <디지털 시민의 진화>와 같은 책을 써낼 정도로 언제나 세상의 변화와 미래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변화의 트렌드를 읽어 거시적으로 미래사회를 구상하는 것이 토플러주의라면, 그의 제안과 전략은 한국사회의 역사와 기술발전의 현실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구체적이며 실천적이다. 그는 인터넷 전문가를 거쳐 이제 '경세가'의 반열에 들어선 듯 하다.
그의 논리는 지식, 민중, 권력의 상호작용에 근거해 있다. ”권력의 의지, 지식의 진리, 민중의 행복이 솥단지처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주장이다. 권력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민중의 행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임진왜란의 승리가 그러했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그러했으며, 김대중이 만들어낸 지식정보 사회가 그러했다. 반대로, 권력과 결맞지 못한 지식인 정도전은 실패했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한 병자호란은 비극이 되었다. 그렇게 지식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축을 위하여 열려 있어야 하며, 과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동시에 권력과 행복하게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지식과 권력의 결합은 유신에 참여한 지식인들처럼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권력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지식인은 ”권력과 민중과 함께 달리되 그들에게 복속되거나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연과학적 합리성을 위해 통섭할 줄 알고 사회과학적 설득을 위해 공감하고 대화한다.“
여기서 ’지식‘은 추상적 명사가 아닌 ’지식인‘이라는 구체적 존재로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지식, 권력, 민중은 지식인, 정치지도자, 민중이라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 지식인은 고대 삼두마차에서 멍에를 지지 않으나 다른 두 마리 말과 함께 달리면서 가야할 방향을 조정하는 ’파레오로스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이는 그동안 지식인에 대해 흔히 부여하고는 했던 ‘비판적 지식인’ 또는 ‘독립적 지식인’, ‘어용 지식인’ 등등의 논리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이 권력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독립적 지식인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지식을 생산한다면, 어용 지식인은 권력을 위해 기꺼이 곡학아세를 서슴지 않는다. 파레오로스 지식인은 새로운 지식을 개방적으로 흡수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국가의 미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다. AI로 지식 생산과정이 혁신적으로 바뀌는 상황에서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역할도 달라졌다. 지식인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낡아버린 구시대의 표상인 듯하지만, 저자는 다시 이들의 역할을 강조하며 AI 시대의 혁신을 이끌 주역으로 평가한다.
파레오로스의 지혜라는 ‘여의주’는 저자 자신의 지향으로도 읽힌다. 그가 이 책에서 거론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얻은 교훈, 기후변화라는 도전과 AI가 가져온 혁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전개 등은 변화하는 시대에 부합하는 ㄱ 자신의 ‘파레오로스의 지혜’를 얻기 위한 편력이었다. 그가 갈고 닦은 지혜는 ‘AI전환 연대’, 민주당 ‘디지털정당특별위원장’ 등의 형태로 지금 쓰임새를 얻고 있는 형국이다. 그가 골방에 틀어박힌 지식인이거나 디지털 오타쿠였다면 ”권력과 지식이 결맞는 위대한 시대“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지식인의 ‘경세제민 전략’이면서, 그의 지적 편력, 역사와 현실에 대한 사유가 녹아 있는 ‘지적 자서전’이기도 하다. 게다가 자신의 ‘질병’을 알게 된 이후에 쓰기 시작했으니, 6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발효시켜 온 그의 생각들이 행간마다 절박하게 스며들어 있다. 그가 펼치고 있는 ‘파레오로스의 지혜’가 실천적 의지를 갖춘 선한 권력과 만나 ”민중의 삶에 성공과 행복“을 만들어 내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