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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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영화를 공부하는 후배 한 녀석이 물었다. “형, 심수봉 노래의 비밀이 뭔지 아세요?” 그와 나는 주책 맞게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심수봉의 열렬한 팬이다. “심수봉은 그대, 당신이라고 하지 않고 항상 ‘여자’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나는 여자이니까’ 등등의 노래를 떠올려 보니, 그래, 맞다. 심수봉은 대상이 모호한 그대, 그녀, 그 라고 하지 않고 남자/여자를 말한다. 심수봉 노래속의 ‘여자’는 사랑에 달뜨고 몸살이 나며, 질투하고 욕망하는,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여자’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내보이는 ‘여자’. 이게 남근적 시선이라고? 그래도 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수컷’이거나 ‘암컷’이다. 중간이거나 초월은 없다.

최영미의 시는 바로 그런 ‘여자’의 시다. 오랜 만에 그녀의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을 사서 군밤 까먹듯 읽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도 그녀는 사랑하는/사랑했던/사랑하고픈 여자임을 표나게 보여줬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그렇다. “무릇 여자로 태어나 노래하는 것들/홀로 달콤하며 홀로 아프고/홀로 뜨거운 것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2007년의 사포’)라니, 이건 그녀에게 불가피하게 수락해야할 ‘운명’인 모양이다. 이 운명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러나, 심각하지 않다. 관음증의 그것처럼 음습하지도 않고 차라리 유쾌하다. 그녀의 시는 자주 스무살 무렵의 시간대로 회귀하는데, 그런 시를 읽을 때면 나 역시 그맘 때로 돌아가 그녀의 문장 속에 내 삶을  뒤섞곤 한다. 이것도 바르트적인 의미의 “쓰여지는 텍스트”인 것인가. 그녀의 시는 내게 ‘마들렌 과자’인가. 

최영미의 사랑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가 휘젓고 다닌 구석구석이/흉터와 무늬가 되어/그가 일으킨 물결 밑에/꼼짝않고 얼어붙어/비가 와도 나는 흐르지 못한다.”(‘ love of my life?’) 몸에 각인된 흉터와 무늬. 불쑥불쑥 현재의 삶으로 틈입하여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드는 몸의 기억들. 그런데, 이상도 하여라. 그녀는 흉터와 무늬를 남겼던 사랑의 역사를 다시 반복하기를 꿈꾸고 있으니, “이대로 세차게 흔들리다/누군가의 가슴바닥에/훅, 떨어졌으면...”(‘11월의 낙엽’). 그녀에게 사랑은, 몸으로 욕망하는 사랑은, 존재의 법칙이자 이유(raison d'etre)인 모양이다. 그녀는 “좋아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독약이라도 마다 않는”(‘그여자’) 여자였을 것이며, “날마다 찾아오는 쾌락을/잘게 부수어/구멍으로 밀어 넣는다/싱싱한 고기의 피묻은 입술(‘가장 쉬운 길’)로 살과 피를 먹고 살아야만 비로소 살아가는 힘을 얻는 여자.

이 정직하고 싱싱한 욕정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몸이 벌써 그걸 먼저 알아챈다.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웠던/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가까이 코를 갖다댄다//그렇게 학대했는데도/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중년의 기쁨’) 이런 몸적 인식은 역사의 진보에도 적용이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몸의 변화이자 그 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가령, 이런 ‘아줌마스러운’ 인식(?)은 즐겁다. “유모차 부대를 호위하는 청년들이 어찌나 멋있던지!/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역사는 이렇게 진보하는 거야”(‘2008년 6월 서울’) 남자 몸의 품종개량의 역사가 곧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다. 이건 ‘여자’로서의 자각이 아니라면 쉽게 보이지 않을 터. 꽃미남에 열광하는 이 중년 여자의 욕망은 별로 추해보이지 않는데, 그건 생기로 발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잘 알려진 축구광이자 호나우디뉴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몸의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여자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자 다시 사랑할 순간이다. “너를 보기 전에 나는/내가 얼마나 아름다움에 굶주렸는지를 몰랐다/너의 풍부한 표정, 입가의 사소한 움직임을/놓치지 않으려 눈을 반짝이다.../누워 쓰러지기 전에 나는/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알지 못한다”(‘일상의 법칙’) 굶주렸으니 채워져야 하고, 채워지지 않으면 그것은 죽음이다. 욕망하는 존재, 욕망하는 여자. 욕망이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중년의 나이를 쓸쓸하게 확인하는데, 그것은 죽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빨 빠진 늙은이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겠지/욕망이 지나간 구멍으로 바람이 들락거리겠지, ‘온종일 집에서’) 김지하의 말을 비틀어 말하자면, 사랑이 아니면 자살이다. “겉은 멀쩡하고 속은 화산이 타고 남은/재에 묻힌, 그녀는 날마다 자살을 꿈꾼다”(‘어떤 동문회’)

유예된 욕망, 채워지지 않는 사랑이므로 그녀는 반생은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이다. 떠돌이의 삶이므로 연애와 사랑으로 충만했던 과거를 회고할 도리 밖에 없다.(“이 남자에서 저 여자로 옮기며/나도 모르게 빠져간 젊음/후회할 시간도 모자라네,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립스틱 짙게 바르고, 탐욕스럽게 몸을 갈구하는 육식동물로서 살아가던지, 


그것을 하지 않고
팔 년만에 돌아온 봄이었다.  


금욕에 길들여진 정갈한 방.
화분에 물을 주고 밖을 내다 보니
벌레처럼 들끓는 봄볕
범람하는 꽃가루 때문인가  


쉽게 행복해지기를 거부하던 육체가
바위처럼 뻣뻣해진 가슴 열고,
뜨거웠던 용암의 분화구를 추억한다.  


사교계의 꽃이 되고 싶지 않아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가
길게 누워 봄을 앓는다  


소문만 무성했지 자신을 불사르지 못한 

 생애의 마지막 연기를 준비하며
옷을 갈아입고 립스틱을 칠한다.
(취미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겠지?)  

 

질겨진 가죽에 향수를 바르면
육식동물이 될까?
- 4월은 잔인한 달  


이 시집의 발문은 그녀의 첫 시집을 두고 “욕정을 사랑으로 은폐함이 없이 성에 직핍한 그녀의 대담성에 독자들, 특히 남성들은 혼비백산하였다”는 최원식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혼비백산은 너스레일 것이다. 현실원칙의 제어를 받지 않은 쾌락원칙의 솔직한 토로는 혼비백산하게 만들지 않고, 은밀한 공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은밀한 이유는 추상과 논리를 경유하지 않고 남자-여자를 잇는 사적인 회로를 거치기 때문이다. 시를 쓰느라 낑낑대며 언어를 메치고 되치며 은유와 상징의 좁고 복잡한 우회로를 통과하는 건 때로 시에 대한 매혹을 반감시킨다.  

 

반성(reflexive)이 지나치면 요상한 시가 되기도 한다. 그녀의 시를 읽으며 이제 막 중년으로 접어든 여자의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을 마주하는 건, 내 안의 그것을 일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로 인하여 잃어버린 생기를 되찾고 “마지막 연애의 상상”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최영미 시를 보며 그런 몽상에 잠시 젖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눈을 들어보니 시커먼 사내들이 튀어나온 배를 흔들며 지나가고, 숙취로 얼굴이 벌건 아저씨들이 이빨을 쑤시고 앉아 있다니. 허망하여라, 내 우울한 몽상이여, 5월 한낮의 백일몽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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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5-14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말이우, 형은 날 것 그대로의 욕망에 충실하신지?

어디(?)에 쏠려야할 욕망이 모조리 상반신 끝으로 전이돼 버린 건 아닌가...

책으로만 발산되는 건 아닌지...

모든사이 2010-05-1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어?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