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은 내겐 이미 포화상태인 서재에 그 책을 들일지 말지. 이른바 정규직으로 채용할지 말지 결정하는 2주간의 합숙면접을 보는 과정일 따름이다.

도서관의 비치희망도서 서비스를 적극 이용하는 최근엔 알라딘(인터넷 구직 사이트)에서 간단한 서지소개(이력서)를 보고 마음에 든 책을 희망도서로 신청한 뒤(면접통보) 신청한 도서가 들어왔다는 문자가 오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온다. 그렇게 2주간의 합숙면접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책은 서재에 온지 한 시간도 안 되어 합격 여부가 판별된다. 슬쩍 보기만 해도 영 아닌 책들은 읽는 시늉조차하지 않고 2주간 서재구석에 처박혀있다가 도서관으로 되돌아간다. ˝귀서의 자질은 높게 평가하나 본 서재와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다른 서재에서 더욱 빛나는 책이 되리라 믿습니다. 불합격!!˝

반면 한 눈에 홀딱 반한 책은 서둘러 구입한다. 어차피 나중에 공들여 읽을 것이기에 마찬가지로 읽지 않고 도서관에 반납한다. 책이 도착하면 정규직에 합격한 것이므로 영구히 내 서재에서 나에게 충성을 바치는 영광을 누린다. (물론 해고를 당하거나 퇴직을 하여 중고서점으로 방출되는 책들도 여럿 있었다)

때론 전자책으로 구입하는 책도 있는데 어찌보면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값싼 비정규직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책들 중 운좋은 일부는 정규직으로 채용 되기도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경우다. (중고로 사긴 했지만)

그럼 도서관에서 빌려서 다 읽고 반납하는 책은? 바로 인턴십이다. 필요한만큼 부리되 고용하진 않는다. 재미는 있지만 사려니 좀 아쉬운 점이 있는 책들이 이런 처지가 놓인다. 대부분의 이유는 책값이고, 때론 내 서재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입을 꺼리기도 한다. (이런 책들은 비정규직인 전자책으로 들이기도 한다)

최근 내 서재에 인턴십이 두 책 들어왔는데, 한 책은 어제 북플에 글을 쓴 ˝아인슈타인의 주사위와 슈뢰딩거의 고양이˝이고 다른 하나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이다.

일단 이책의 첫인상을 말하자면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에 저자의 전작인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의 성공을 강조하는 문구들이 실려있어 마치 구직자의 이력서에 정작 자신의 경력보다 자기 아버지의 화려한 경력이 강조된 것처럼 느껴져 나같이 의심많은 독자에겐 ‘이 책은 별로인거 아냐?‘ 라는 불신감을 일으키는 효과를 냈다.
거기다 출판사인 까치의 (좋게말해) 예스러운 책 디자인과 편집 때문에 출간된지 10년은 지난 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재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고루하고 딱딱한, 학술적인 내용이 가득 담겨있을 듯한 인상이다.

그래서 오늘 TV를 튼 채 아침을 먹으며 이 책을 슬쩍 들췄을 때 별 기대는 없었다. 그저 어떤 내용인지 한번 보기나 하자는 심산이었는데, 어느새 TV를 끄고 책을 집중하며 보고 있었다.

저자는 정신질환이 되풀이하여 나타난 자기 집안의 비극적 역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집안의 정신질환 역사가 빨간 줄처럼 저자의 의식을 가로지르고 있는 동안, 저자의 암 생물학자로서의 연구도 결국 유전자의 문제로 수렴된다. 그리하여 과학자, 학자, 역사가, 의사, 아들, 아버지로서 저자는 자신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를 탐구하는 이 책을 쓰게 된다.

유전자의 역사를 역사의 순서대로 다룬 책인지라 초반엔 어려운 내용이 없이 무척 재미있다. 뒤로 갈수록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이 발전함에 따라 다소 어려운 내용이 나올 것 같지만 이렇게 글솜씨가 좋은 저자라면 6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이라도 무리없이 끝까지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책인데 귀댁의 서재에도 한 권 어떠신지? 정규직 채용이 어렵다면 시험삼아 인턴십으로라도 채용하심을 권한다. 유전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서재주라면 후회없는 선택이 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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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23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서관에 빌린 책을 읽고 마음에 들면 구입해요. 안 읽고 책을 고르는 책의 경우, 반품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그런데 한 번 읽은 책을 사면 후회하는 일이 없어요. ^^

유도링 2017-06-23 15:24   좋아요 1 | URL
저도 인터넷 서점의 정보만 보고 책을 샀다가 몇번 낭패를 본 뒤에 일단 맘에 드는 책은 메모 해놓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직접 보거나 도서관에 신청해 본 뒤에 구매하는 편이에요. 요즘 책 값도 비싸서 ㅠㅠ

asdur 2017-11-02 0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읽기에 대한 글 중 가장 재미있고 공감을 자아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