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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 내게 왜 여행하느냐 묻는다면
박세열 글.그림.사진 / 수오서재 / 2017년 7월
평점 :

언젠가부터 스케치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마도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찍어 담는 기록보다 조금은 느리게 그곳에 앉아 내 감상대로 종이에 오롯하게 옮겨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림은 선 긋기도 하지 못하고, 사람을 졸라맨처럼 그려도 참 못 그렸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라 정말 그림 배우고 싶다는 갈증만 커지고 있는데, 그림을 그리며 여행하는 여행자들을 볼 때마다 조금은 시샘하는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참 좋겠다. 그들도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며 길을 걷고 싶은 생각을 했을까?
다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다시 지난번 같은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매달 꼬박꼬박 일정한 월급이 들어온다.
그리고 언젠가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잔고가 생길 것이고 꼬깃꼬깃 숨겨둔 비상금 대신 비상용 카드를 어딘가에 숨겨둘 것이다.
더 이상 그 도시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을 참고 넘어갈 일도 없으며 쥐가 나오는 싸구려 숙소 대신 몇천 원, 몇만 원을 더 주고 비교적 더 나은 숙소를 찾아 나서겠지.
그렇게 언제나 포기보단 신용카드를 떠올릴 것이다.
지난번보다 조금 더 풍요로운 지갑은 더 큰 즐거움을 떠올릴 것이다. 지난번보다 조금 더 풍요로운 지갑은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그런 즐거움은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
지나고 보니 참 반짝거렸던 시간이구나.
그래도 지난 여행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저 흔한 기억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p19
같은 곳을 한 번 더 여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더 괜찮은 일일 수도 있다.
처음 찾아간 곳은 낯선 도시일 뿐이고 여행자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그러나 두 번째는 조금 익숙한 길을 따라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된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는 잊고 있던 먼 곳의 친구가 문득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기억이 만들어진다. /p42
여행을 하다 보니 내가 보는 그곳을 종이에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의 박세열 저자는 카메라에 찍어 남기기 보다 천천히 사람 사이로 여행하는 느린 여행을 택했다. 때론 여행지 벽화에 그림을 남기기도 했고 만난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오랜 시간 바라보며 종이에 그곳을 남기는 일은 어쩌면 마음 깊이 새기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언제나 시차의 나른함으로 시작했다.
겨우 한두 시간의 미묘한 차이일지라도
여행 첫날 우리를 노곤함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간혹 너무 멀리 떠나기라도 하면 시차가 열 시간은 가뿐히 넘어 밤낮은 온통 뒤죽박죽되어 사나흘은 아무것도 못하곤 했다.
그래도 여행이 끝난 일상에서 '시차'라는 단어만큼 단번에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는 없지 않을까?
무거운 피로감이 밀려오지만 그만큼 설레는 기억을 함께 가져다주는 말이기에. /p169
디지털 카메라로 하루에도 수백 장은 찍으면서 필름 카메라 36장을 다 찍는 데 꼬박 일 년이 걸렸다.
같은 사진이라도 셔터 한 번 누르는 마음의 크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몇 시간 동안 끝없이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누군가와는 며칠 동안 그만큼의 반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색함의 문제가 아니라 한마디에 담는 마음의 크기 때문이었다. /p340
여행하는 방식도 다르듯, 여행에 부여하는 의미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좀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스케치로 남기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를 읽고 더 커졌다. 여행지를 방문해서 여행했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보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장소를 기억하는 여행. 일상을 떠나 조금 다른 일상으로 옮겨 같 듯한 여행.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듯한 여행이 아닐까? 연일 이어지는 폭염주의보 문자에 지쳐가고 지독한 여름 감기로 지쳐가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조금은 나른한 꿈을 꾼 듯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상도 여행같이 산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스케치북을 들고 나오니 짧은 여행을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이 일상의 소소한 여행일까?
삶의 타협인지 순응인지 혹은 이제야 진정한 여행에 대한 대단한 의미를 찾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여행하지 않는 나날들이 어떤 중독자의 금단 현상처럼 힘겹지 않다. 반복되는 지루함도 싫지만은 않고 약간의 스트레스도 나쁘지 않다. 여행처럼 큰 자극은 없지만 가끔 소소하게 퇴근후 마시는 커피 반 잔도 나름 충분히 기분이 좋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 혼자 스케치북을 들고 나와야겠다. 여행하듯. 여행하듯. /p396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