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푸어 소담 한국 현대 소설 5
이혜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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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고3때가 떠오른다.  특히 이럴 때면.  이 세상은 단 한 번의 수능으로 우리의 인생이 바뀔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수능 백 일 전부터 엄마는 전국의 절이라는 절은 다 다니며 기도를 해댔고, 수능 날 아침에는 행여 1분이라도 늦어 내 인생이 망할까 봐 경찰 오토바이가 아빠 차를 비호해주기도 했다.  그 하루가, 내 남은 인생의 계급을 결정지어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나는 면도칼로 손톱 밑을 찔러가며 공부했다.  수능이 끝나고 어둑어둑해진 낯선 학교 정문을 나서면서, 나는 내 인생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 확신했다.  /p016



수능을 기점으로, 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인생이 크게 바뀔거라는 생각,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십대가 지나고 삼십대가 되어서도 인생에 커다란 변화는 그닥 일어나지 않는다.  학창시절의 스펙대로 사회에서의 등급이 매겨지는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요즘은 결혼의 조건(?)중에 여자들도 경제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많다고 하고, 실제로도 맞벌이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정말 순수하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만으로 하는 결혼?  있을까?  남녀가 만나는데 있어 결혼을 배제한 연애를 할 수 있는 나이는 언제까지 일까?  그리고 연애를 하는 그 순간에도 상대를 온전히 사랑 할 수 있는 시기는? 언제까지 일까? 



​하나의 세상이 끝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새 세상에 적응하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p155



내 모든 관심은 나에 대한 그의 감정이 어려운 순간을 함께 겪어온 사람에 대한 동지애인지, 손끝만 닿아도 가슴 떨리는 여자에 대한 사랑인지가 미치도록 궁금하다는 데에 있다.  30대가 되면서 남자들로부터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집 가깝고 편한 여자가 최고다.  내 또래 남자들이 가슴 뛰고 인생을 바치는 사랑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는, 이제 돈 잘 벌어오고 애 잘 키울 부인감이나 찾겠다고 노래하는 걸 볼 때마다 나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나는 남자를 쥐고 흔드는 치명적인 여자이고 싶었다.  나 때문에 남자가 희로애락 모든 감정의 끝을 맛보면서 롤러코스터를 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어딘가에 가슴 뛰는 사랑을 품어놓고는 내 옆에서 휴식을 찾는 남자 따위, 거둬주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쉼터가 되느니 가시밭길이 되는 게 나았다. /p171-172



32살의 은행원 다영은 직장후배에게도 승진의 기회를 뺏길 위기에 처해있고, 결혼에선 점점 더 멀어지는것 같다.  고교시절 날라리 친구를 vvip 고객으로 만났을 땐, 그동안 살아온 인생들이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살아야할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은행의 거액 고객, 솔직히 직업이 뭔지도 모르지만 돈이 많고 미혼인건 확실 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이성욱'을 남자로서 호감을 가지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120평 아파트에서 안전하고 편하게 그 사람이 벌어다 주는 돈을 쓰며 살기엔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것 같아 두 눈을 딱! 감기로 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가 그 곳에서 남자답지 않게 뽀얗고 예쁜(?) '우현'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는 서울 한복판에 정체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좀비들이 사람들을 물고, 이런 사태가 점점 커지면서 강북이 폐쇠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와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고민하는 다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 메르스가 잠잠해진지 얼마 되지 않은 후에 읽은 터라, 이런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20대의 나였다면 당장 그에게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아니, 그를 확 끌어안아 먼저 키스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30대 여자의 연애는 다르다.  나는 그와 미래를 함께할 생각도 없고, 어설픈 애정 놀음으로 어색한 사이가 될 생각도 없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기엔, 거쳐야 할 계산기가 너무 많다.  /p173



​인류 역사상 결혼이 낭만의 영역에 존재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결혼은 서로의 신분을 섞고 세탁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재화 혹은 권력은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숨만 쉬어도 갚아야 할 빚이 늘어가는 이 사회에서, 서로 나눌 게 전혀 없는 남녀간의 결합은 사회.경제적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p206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땐 옆에 있어줄 사람이 중요하지만, 명확한 목표가 생기면 옆에 있는 사람이 거치적 거리는 법이다.  /p223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큰 재미를 느끼진 못했지만, 만약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라는 상상을 하며 읽는 재미도 있을것 같다.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극한의 상황에서, 사랑에 대한 다영의 생각들은 현실적이고 냉철해지지 않았을까?  읽다보니 글의 흐름대로 사랑, 인생, 결혼관에 대한 내 생각들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게 되는것 같았다.     벌써 시작된 뜨거운 폭염,  상상력을 동원해 읽으면 더 재미있을 <로맨스푸어>  여름이 가기전에 읽어보시길 추천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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