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게임
카린 알브테옌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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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알브테옌의 본격 심리 스릴러!  - 책표지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스웨덴 작가의 책.  카린 알브테옌 이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소설이었다.  주로 일본문학이나, 영미권의 책들을 접할 기회가 더 많았는데 북유럽권 작가의 책은 처음이기도 하고 책표지가 왠지 호러에 가까운 책은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거의 떠나고 인적드문 스칸센 놀이공원  홀로 앉아있는 네살의 남자아이.  그 아이가 들고 있던 책에서 나온 메모엔 이 아이를 잘 돌봐달라는 메모가 있다.  그리고 아마도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지역.  독거노인 예르다가 죽은채로 자신의 집에서 발견되고 주택관리인인 마리안네가 대신 예르다의 짐을 정리하며 장례절차를 준비한다.  짐 정리도중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 문학계의 거성 '악셀 랑네르펠트'의 친필사인이 수록된 다수의 작품들과 가족사진을 발견하게 된다.  마리안네는 그녀의 장례식을 위해 그나마 그녀와 인연이 있을거라 생각되는 랑네르펠트가에 연락을 하게 된다.  가정부의 죽음으로 드러나는 랑네르펠트일가의 어두운 비밀. 

 

젊은 사람들은 삶에 목표가 있다고 믿는다.  악셀도 그러했다.  바로 그날 악셀은 그 말을, 그것도 맹목적으로 믿었으며, 부모가 무너져 내릴 정도로 실망하는데도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끝냈다.  그리고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삶이 끝없는 여행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예정된 목표 지점에 도달할 때 즈음이면 그곳이 또 다른 출발점이 되었다.  어떤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끝이 있을 뿐, 그리고 마침내 끝에 도달해 보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가지 못한 곳이 너무나 많았다. -p124-125

젊은 시절의 악셀 랑네르펠트는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고 작가의 길을 선택한다.  알리세와는 문학이라는 접점에서 함께 글도 쓰고, 꿈을 꾸며 가정을 꾸렸지만 악셀의 성공뒤에 알리세의 지지와 희생도 어느 정도 필요했다.  악셀이 몇몇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되지만 작품집필에 대한 한계를 느껴가고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해가는데 혼자힘으로 버겁다는걸 느끼게 된다.  알리세는 아이들이 자란후에도 글을 쓸 수 있었음에도 왜 집필을 하지 않았을까?  악셀의 성공.  그러나 점점 멀어지는 두사람.  그러면서도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가정은 포기 하지 못한다.

 

이혼은 안 될 일이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헤어질 이유가 충분하다 해도,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들이 있었다.  친구도 거의 없었고 부모형제들과 연락도 다 끊긴 마당에 어대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악셀 랑네르펠트 부인으로 남으면 지위라도 누릴 수 있는데.  허상을 유지하기 위해 치른 그 모든 희생-p164-165

문득 권력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게 아니면서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가문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던 알리세.  그녀가 그 모든걸 떠나 조금더 자유로울수 있었다면 랑네르펠트가는 다른 상황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악셀은 책의 밤 행사에서 할리나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고 하룻밤 사랑을 나눈다.  알리세와는 소원해진지 오래되었고 그런 감정이 자신에게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룻밤의 꿈이라고 생각하고 집필에 전념하려하지만 할리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할리나는 악셀의 문학적 지위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아 자신도 등단하고 싶었던 것이다.  악셀의 친구이기도 하고 할리나를 짝사랑하는 토리뉘.  할리나는 그런 토리뉘는 바라봐주지 않고 악셀에게만 집착한다. 할리나는 자신이 집필한 원고를 읽어달라며 보내기도 하고, 편지도 매일  보낸다.  급기야 악셀에게 아무 연락도 없자 그의 집에 찾아가 자신과 악셀의 하룻밤을 적은글을 출판사에 팔겠다며 협박을 한다.  

 

알리세가 느낀 것은 놀라움뿐이었다.  그녀는 촛대를 쥐고 있는 손을 보고는 그것이 자기 손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손이 본능에,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따른 것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라는 본능에.  알리세는 자기도 모르는 새 내면 어딘가에 그 본능을 숨기고 있었다.  지극히 칭송받는 남자의 그림자에 가려진 삶.  알리세는 그 작은 성공을 위해 엄청나게 희생했다. 그 작은 성공을 위해, 살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것조차도 두렵지 않았다.  -p313



알리세의 순간적인 살의는 본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악셀 랑네르펠트'라는 그들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지극히 칭송받는 남자를 위해 가려진 삶을 살았고 자신은 희생의 댓가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것조차 두렵지 않았다.

 

얀-에리크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허리를 굽혀 손으로 삽자루를 쥐었을 때도, 따라잡으려고 달리기 시작했을 때도, 문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자갈길에 누워 있는 움직임 없는 시신을 보았을 때조차도.  그가 느낀것은 놀라움 뿐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삽을 쥐고 있는 손에 닿자, 그는 그것이 자기 손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손이 본능에,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따른 것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라는 본능에.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 내면 어딘가에 그 본능을 숨기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분투하며 일궈 낸 작은 성공.  지극히 칭송받는 남자의 그림자에 가려진 삶.  그 작은 성공을 위해, 그는 살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구덩이는 이미 파헤쳐졌다.  처음 땅을 판것은 앞서 간 사람들이었다.  31년 뒤에 그곳을 가족묘지로 만든 것은 다음 세대였다. -p384

대를 잇는 살인.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부모는 할리나를, 그의 아들은 할리나의 핏줄인 스칸센 놀이공원에 버려졌던 아이<크리스토페르>를 살해하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저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독거노인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가벼운 이야기 인듯 하지만 작가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극중 관계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욕망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피붙이는 물론 살인까지 그들이 가진것을 지키기 위해선 정당화 시키는 그들이 이루고자 한 위업은  그 후광으로 과거 세대가 이루어놓은 후광으로 조금더 편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정녕 편하기만한 삶은 아니었다.  반복되는 과거, 그로인한 희생, 고통의 댓가로 이루어진 명성과 영광은 과연 가치있는 것일까?   결국 그러한 위업으로 이루어진 권위나 명성으로 인해 행복하다고 느끼고 싶었던것 아닐까?  그 당시 잘못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선택과 행동들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결과물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더욱 포기하지 못하고 반복하게 되는 악순환이지 않았을까?

 

나는 극히 일부분분의 내용만 담았다.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연결성등 생각지 못한 반전이 인상깊었고, 눈에 보이는 것을 지키기 위해 거짓을 포장하고 그 거짓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고, 살인을 서슴치 않으며 지키고자 했던 위업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얼마나 본능적인지 잘 표현한 작품인것 같다.

 

어떤 이유로 우리는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 순간의 환희와 감각적 황홀경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필요한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려고 하는 용기일지도 모릅니다-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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