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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이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9
장강명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8월
평점 :

땅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다리를 들어 올려도 그 발을 앞으로 뻗을 수가 없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발을 질질 끌며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가, 그냥 그 주변을 서성였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못 걷겠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고개를 숙이고 울면서 서성이고, 서성이며 울었다. 왜 태어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다 잃고 병에 걸리고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하는가. 인간은 고통을 받으려고 태어나는 걸까. 사람이 뭘 통제할 수 있고 무슨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인가. (중략) 적어도 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순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서성이다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되겠지. 원하건 원치 않건 미래가 그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결국 그는 미래와 타협하게 되리라. 희미해진 혹은 익숙해진 고통에 자신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트라우마를 통해 성장했다는 따위 말을 지껄이게 될 거라 상상하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_213~214p.
최근 몇 년 사이,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 다닐 일이 부쩍 늘었다. 매달 병원 스케줄을 확인해야 할 만큼 한 달에 적게는 2번 많게는 4번 병원을 다니고 있다. 작은 병원을 시작으로 대학병원까지 다니게 되면서 느낀 건.... 아픈 사람이 정말 많고 그런 환자의 곁을 지키는 가족의 모습도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내 부모님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정말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서성이다>는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한편 소설이기도 하다.
아내이자 동료였고 친구이기도 했던 아내의 갑작스러운 뇌출혈, 그리고 3일간 숨 가쁘게 이어지는 병원과 화자의 심경을 이어가는 이야기는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을 때의 고통스러운 마음, 한편 지극히 현실적인 일을 처리해야 하는 적나라한 모습. 어쩌면 지극히 고통스러운 현실에도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남은 이는 시간이 흘러가듯 고통과 함께 흐르듯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섣불리 위로하려 하지 않고 지극한 현실 앞에 무너지지 않고 그 시간을 견디며 나아가는 사람의 이야기.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고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기에 더 깊이 와닿는 이야기였다.
작가님의 아내분도 모쪼록 건강히 완쾌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웃겨? 그는 아내에게 가끔 물었다. 몰라. 웃겨. 아내가 대답했다. 뭐가 그렇게 슬퍼? 그는 아내에게 가끔 물었다.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듯이 밀려와, 슬픔이. 아내가 대답했다. 그 문장을 곱씹을 때 그는 안개가 자욱해서 수평선이 보이지 않고 사람 하나 없어 쓸쓸한 바닷가 갯벌에 자신과 아내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들의 네 발은 이미 진창에 잠겨 있다. 슬픔은 밀려 들어온다기보다는 차오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고 있다._23p.
나는 침통한가? 정말 슬픈가?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아내 곁을 지킬 건가? 심한 감기에 불과한데 119를 부르는 바람에 시간을 뺏겼다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의심이 많은 성격인 그는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런 상황에서 선량한 사람이라면 내뱉어야 할 대답을 자신 있게 쏟아낼 수 없었다. _76p.
그는 장모 옆에서 뇌종양에 대해 검색하고,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을 살피고, 전화를 받다가 12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인생의 한 단계가 끝났으며 다음 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 단계가 어떤 풍경인지,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_196p.
나는 지금 슬픈 걸까? 그는 또 생각했다. 두려움, 답답함, 막연함은 이제 아주 잘 알았다. 매사에 의심이 많은 인간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그런 감정을 겪고 있다는 데에는 일말의 의구심도 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슬픔이란 뭘까? 아내에게 바닷물처럼 밀려 들어온 감정은 도대체 어떤 걸까? _207p.
고통은 자격을 묻지 않는다. 인품이나 업적을 따지지도 않는다. 고통은 찾아와서 머문다. 고통은 모든 인간이 자신을 믿게 만든다. 고통은 거대한 존재다. _2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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