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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 ㅣ 소설Y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5년 1월
평점 :

#허밍 #도서협찬
#최정원
"남들 일은 참 쉬워요. 멀리서 보면 너무 간단하죠? 가까이서 보면 아니거든요. 다들, 가끔은 바람 없는 날에도 움직여요.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어떨 땐 목소리처럼도 들려요. 우리 누나는 노래도 부른다고.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_2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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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상실에는 익숙해질 수 없다. 여운이 열두 살에 한 번에 잃은 것들을 이 아이는 구 년 동안 잃고, 다시 모은 것들을 잃고, 또 잃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여운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이 아이의 일상이었던 것이다. 이 아이의 그림자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까? _98p.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서울의 수백만 명의 사람이 나무로 변한 세상, 그로부터 9년이 지나 서울에 설치된 광역 방역 기기 '우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봉쇄된 숲, 서울에 인공지능로봇 R과 함께 서울에 들어가게 된다. 방독 마스크를 쓰고 조심스레 넘은 방벽, 그 너머엔 나무가 된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무가 된 사람들과 나무가 되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마스크 없이도 숨을 쉴 수 있는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바이러스에 면역이 있어 나무가 되지 않은 열여덟 살 정인은 학교에서 나무가 되어버린 누나와 친구들의 나무를 보살피고, 나무화 되어가는 삼촌과 할머니를 보살피며 봉쇄된 서울에서 살아남았다.
여운이 마주친 움직이는 괴생명체는 인간일까? 나무일까?
비극적인 참사로 가족을 잃고 힘든 시간을 견뎌온 여운과 정인, 높은 방벽을 쌓아 참사의 현장을 시야에서 가려버리고 잠시 추모하고 잊은 사람들.. 하지만 더 큰 팬데믹 상황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살아남은 이들에게 진정한 기억과 애도란 무엇일까? 여운, R, 정인... 열린 결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 소설의 결말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좋았다. 좋고, 좋고 또 좋았던 소설.
'그날'의 폭심지는 학교에서 겨우 200여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대피할 사이도 없이 학교는 그 폭풍에 휘말렸다. 감염의 첫 번째 증상은 인지 능력과 판단력의 급속한 저하였다. 본능만 남은 채 변이되기 시작한 학생들은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을 이끌고 운동장까지 내려왔다. 집으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음만이 끝까지 남았다. _79p.
이별은 각오한다고 무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이런 식의 이별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는데.
그들이 구 년간 맞서 싸운 상대는 갇힌 방 안에 한 뼘씩 차오르는 물처럼 막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그들을 둘러싼 삶 자체였다. _136p.
'그날', 방벽 문이 닫히던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제각각의 방향으로 결정지어졌다. 두고 간 강여운의 삶이 조금 전에 들은 그런 것이라면, 남겨진 손정인의 삶은 어떤 것일지. 그 마음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R은 궁금해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_153p.
사자 앞에서 모래톱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처럼, 사람들은 그렇게 두려운 대상을 숨기고 피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을 지켜 왔다. _184p.
인간은 고통스러운 걸 두고 보지 못한다. 불편한 것은 기어코 치워 버리고야 만다. 그래야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잊어선 안 되는 것마저도._209p.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가느다란 허밍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결에 잘못 들은 것일까 착각할 만큼 작고 희미한 노랫소리.
여운은 눈을 번쩍 떴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던 낮은 허밍에, 한 음 높은 다른 허밍이 겹쳐진다. 하나 더.
그리고 또 더.
여운과 정인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들려오고 있었다. 가락도 리듬도 각자 다른 가닥가닥의 소리들이 층층이 쌓이며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화음의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득한, 어딘가 그리운, 가슴이 저리게 슬픈 울림. 노래는 마치 안개처럼 빌딩 전체를, 아니 서울 전체를 희뿌옇게 감싸며 피어올랐다. _317p.
원했던 모든 게 이루어졌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건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나 충분했던 결과이지 이 긴 결말에 어울리는 꿈은 아니었다. 그 모든 시간 끝에 남은 게 홀로 남은 자신의 이 마음뿐이라면 그건 너무, 너무 슬픈 일이다. 이건 슬픈 이야기가 아닌데.
이건 슬픈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_3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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