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 고명재 산문집
고명재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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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뭘까요. 시가 뭘까요. 죽음은 뭘까요. 이런 질문들은 '여름이 왜 오는지' 묻거나 '겨울 전나무가 왜 아름다운지'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에는 답이 없고 반복만 있어요. 그러나 이 반복은 집요해서 아름다워요. 묻고 또 묻고 되묻고 묻고 다시 또 묻고 그렇게 묻다 보니 거대한 능과 총이 서겠죠. 저는 지금 다시 되묻습니다. 사랑이 뭘까요. 시가 뭘까요. 당신은 뭐예요. 내 안에 왜 이리 밝은 것들이 가득한가요. _55~56p.

겨울에 읽으려 아껴두었던 고명재 시인의 산문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새해가 시작하고 한 달 여간 조금씩 아껴 읽었다. 깊어가는 새벽, 일하는 중간, 자다 깨 멍하게 있던 시간... 몇 페이지씩 읽다가 다시 잠들기도 하고 일상으로 금방 돌아가기도 했던 시간들에 스며들었던 문장들. 왜 '사랑'이라고 했는지 글을 읽으며 마음이 먼저 알게 된 것만 같았던 시간들. 어쩌면 언제고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날 다시 꺼내어 읽어야지.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아직 난 잘 모르겠다. 다만 이때의 주어가 '우리'라는 것은 마음에 든다. _35p.

병간 病看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하지 않고서 사각사각 사과 깎는 소리를 듣는다. 사락사락 눈이 또 내릴 때까지 지속하리라. 마음만 쥐고 용감하리라. 그러다 가끔 바늘에 찔린 듯 눈이 아파서 그렇게 병간은 병을 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솔잎 같은 한 사람의 끝을 눈에 담는 일. _109p.

오랫동안 다도를 배운 친구가 말했다. 차를 우릴 땐 끓였던 물을 식혀서 써야 해. 사람도 시도 두 번째 읽을 때 진실이 열린다.

_110p.

이 수건은 하도 오래 썼더니 물방울이 제대로 닦이지 않네. 한 여름 아빠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털면서 중얼거렸다. 참 신기하지 않니, 살에 섬유가 닳는다는 게. 오래 쓰면 수건도 지친다는 게. _148p.

여자는 안개를 내 손에 건네주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 중에서 네가 가장 많은 수의 꽃송이를 받길 바랐어. 한번은 이런 걸 나도 너에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안개꽃만 한가득 담아." 눈앞이 안개 낀 듯 뿌예졌고 나는 꽃송이와 꽃송이 속에 파묻혀버렸다. _157p.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잠든 엄마를 옆에서 꼭 끌어안을 때 그 부피, 그 형상, 엄마의 골격. 그 순간 나는 출렁이는 물의 마음이 되어 엄마를 위해 쏴쏴 나를 버릴 수 있다. 사랑은 언제나 부피와 질량 너머에 있다. _173p.

사랑이 뭘까. 그건 존재가 위태로울 때

등대처럼 제자리에서 기다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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