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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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도서협찬 #정보라 연작소설집

문어였다. 거대한 문어가 다리로 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문어가 말했다. 아니 "문어가 말했다"라는 이 문장은 상식적으로 굉장히 이상하지만 하여간 그 당시 나는 문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문어가 말하는 걸 듣다니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같이 했다. 애초에 대학교 건물 안에 복도를 꽉 채우는 크기의 거대 문어가 등장해서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리며 나에게 말을 거는 사건이 내 평생에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_27p. #문어

행진하며 나는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노화와 고통과 돌봄과 상실의 미래에 이제는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질병과 장애의 두려움이 추가되었다. 나는 건강하지 않은 몸, 손상된 몸, 질병을 가진 몸, 죽어가는 몸으로 계속 저항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중략) 애초에 '정상인'이란 환상 속의 존재일 뿐이다. 현실의 인간은 다들 어딘가 손상되고 어딘가 완벽하지 못한 물리적 실체를 끌어안고 자기 방식으로 생존하기 위해, 존엄하기 위해, 자유롭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든 뭔가 요령이나 방식이 있을 것이다. _243~244p.

정보라 작가의 첫 소설로 읽게 된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해양생물을 주제로 한 첫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등 연작소설들의 제목들은 책장을 덮으며 그 연관성이 뒤늦게 조금 더 큰 연결고리로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다. 강사법 제정으로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나고, 열받은 선생님들이 대거 노조에 가입하게 되지만 변화는 미미했다. 모 대학교가 이런 협약을 완전히 무시하고 멋대로 강사 임용 규정을 제정해 노조가 대학 본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이게 되는데... 시간강사인 나, 반년째 농성장에서 홀러 버티던 위원장(남편) 이 학교 한복판에서 문어를 보게 되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어디론가 끌려가게 되고 풀려나고, 또다시 새로운 해양생물을 만나게 되고 또다시 검은 정장이 나타나고 그럴수록 해양생물들과의 교감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이런 과정이 진행되면서 장애, 노동, 기후와 생태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며, 이 모든 문제와 대결을 위한 해결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의 후기를 읽어보면 실제의 생활에 어쩌면 실제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덧씌워지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게 되는 SF 소설의 매력이란 이런 것일까? 하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했다. 이미 학교 복도에서 마주하게된 문어의 등장에 빵터지고, 스토리의 진행이 유쾌하고 코믹스럽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은데도 페이지는 쉼 없이 넘어간다. 망가지고 있는 세상, 어쩌면 망가진 세상에 맞서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진심의 사랑을 생각해 보게 될 소설. 이 뛰어난 이야기꾼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지게 될 작품이다.

"그러니까 싸워야죠."

잠든 줄 알았던 남편이 중얼거렸다.

(중략)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남편이 돌아누우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도망칠 데가 항상 있으니까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럼 오빠는 왜 싸우는데요?"

세상을 바꾸려고,라고 그는 말했었다. 학생 시절에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조직에 속해서 가장 험한 현장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이야기를 그는 자주 들려주었고 그래서 내가 언젠가 물어보았다. 세상을 바꾸려고. 그래서 그렇게 싸운 끝에 세상이 바뀌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그가 현장에서 30년을 보낸 지금, 그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자신이 세상을 아주 조금이나마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이 지나서, 눈가에 주름이 생기고 손목과 어깨가 허리가 수시로 아프게 된 지금에야 말이다. 싸워서 세상을 바꾼다는 건 그런 것이다. 주로 허리와 어깨가 아픈 작업이다. _66~67p.

(노동하는 존재의 권리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요. 위치 추적 장치를 떼고 도망가요, 예브게니.)

말하면서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권력기관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생명조차 존중하지 않아요. 인간이 아닌 생물도 똑같이 이 지구에서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예브게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떠나요. 잔인한 권력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요. 가서 행복하게 살아요.)

그리고 나는 울었다. 비인간 생물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망쳐버려 살 수 없게 된 바다, 부서진 해저, 죽은 땅과 도망칠 곳 없이 좁아져 버린 지구가 한없이 미안했다. 그러나 우는 것 외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_83~84p.

죽음과 삶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인간의 소멸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게는 진정 자유로운 삶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_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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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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