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본명은 이유미, 서른여섯 살의 여자예요. 내게 알려준 이름은 이유상이었고, 그전에는 이안나였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여자라는 사실까지 속였으니 이름이나 나이 따위야 우습게 지어낼 수 있었겠죠. 그는 평생 수십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았어요. 내게 이 책과 일기장을 남기고 육 개월 전에 사라져버렸죠."_20p.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했던 안나. 가족, 학력, 과거, 자신의 배경까지도 모두 상대방이 믿는 대로 믿게 만들어버리는 것도 그녀의 능력이었을까? 쿠팡 플레이 <안나>, 의 원작 『친밀한 이방인』은 드라마와는 다른 결로 진행되지만 개인적으론 드라마보다 몰입도가 뛰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안나의 삶이 흘러가는 과정이 제3의 인물이 주변 인물을 인터뷰하는 시점으로, 때론 안나 본인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하는데, 임기응변으로 시작된 거짓말이 점점 커지게 되며 그녀 자신도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그 흐름에 올라탔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안나가 했던 거짓말들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대학생으로, 부자집 딸로, 교수로 믿어버리는 주변인들의 시선에 그저 그렇게 흘러가버렸던 건 아닐까?
위태로운 안나의 행보에 '이제 그만 여기서 행복하자' 싶을 때쯤 터지고 마는 그녀에 대한 진실들, 촘촘히 쌓아올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들..."믿는 순간 거짓도 진실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단어가 아닐까 싶다. 수지의 연기와 뛰어난 연출로 드라마도 호평을 받았던 <안나>, 개인적으론 원작 소설을 더 추천하고 싶다.
저는 그 사람이 반복된 거짓과 위증이 무엇을 기인하는지 그 시작과 끝을 알고 싶어요. 단순한 흥미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_44p.
그녀는 늘 돈을 헤프게 썼다. 현실감각이 조금도 없었다. 자연히 이상우는 그녀가 꽤나 부유한 집의 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스스로 그런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굳이 오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 이유미는 걷잡을 수 없이 쌓여가는 거짓에 두려움을 느꼈고, 몇 번인가 진실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언제나 아침이 되면 자신이 없어졌다. 그가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할까 봐, 교지 편집부에서도 쫓겨날까 봐 두려웠다. _98~99p.
그녀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모든 게 다 거짓은 아니었다고. 함께했던 시간 동안,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고. 하지만 이제 그녀도 의심스러웠다. 그들이 나눈 게 진짜 사랑이었다면, 어떻게 이토록 간단히 깨질 수 있단 말인가. 그를 정말 화나게 하는 것은 그녀의 거짓말이 아니라, 그녀가 번듯한 양복 체인의 상속녀가 아니라는 사실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너무나 간단한 심경의 변화였다. _113p.
이유미가 능숙한 거짓말쟁이였다면, 임재필은 이기적인 방관자였다. _201p.
아버지와 엄마. 나는 그들과 한집에서 이십 년간 함께 살았지만 두 사람의 진짜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 평범하게 걷고 있는 길 위의 풍경처럼 그들의 결혼생활도 그랬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_204~2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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